<종교칼럼>

김용은 / 원불교 충북교구 사무국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범상한 사람들은 현세(現世)에 사는 것만 큰 일로 알지마는 지각이 열린 사람들은 죽는 일도 크게 아나니, 그는 다름이 아니라 잘 죽는 사람이라야 잘 나서 잘 살 수 있으며, 잘 나서 잘 사는 사람이라야 잘 죽을 수 있다는 내역과 생은 사의 근본이요 사는 생의 근본이라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조만(早晩)이 따로 없지마는 나이가 사십이 넘으면 죽어 가는 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하여야 죽어 갈 때에 바쁜 걸음을 치지 아니하리라.”

혹시 삶이 공허하신가요? 중년에 방황해 보셨나요? 바람을 생각하신 적이 있나요. 영적 대화를 나누고 싶은 친구를 갖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나이 마흔이면 죽어가는 보따리를 챙기라고 하신 대목을 상기하면, 전 늘 이 법문을 대할 때 마다 왜 한참 삶이 왕성한 이때에 죽음이 보따리를 이야기하셨는지 의아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때는 수명이 50~60밖에 안돼서 지금 말씀하신다면 아마 나이 60이면? 죽음의 보따리를 준비하라고 하셨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도 그렇게 썩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느날 설교 준비하다가 우연히? 심리학자 C.G 융의 글을 보면서 ‘아하!’ 하는 탄성을 질렀습니다.

융 자신이 38세 되던 해 자신도 모르게 세상이 무상하고 공허감에 빠지게 되면서 방황하게 됩니다.

그는 그러한 자신이 혹시 미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왜 이런 심리현상이 일어나는가 깊이 천착하게 됩니다. 그는 대가답게 이 과정에서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되는데 ‘인생의 2단계’라는 이론입니다. 내용인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40~45세가 인생의 정오(the noon of life)를 기준으로 오전의 인생(the morning of life)과 오후의 인생(the afternoon of life)이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오전의 인생은 부모로부터 태어나 신체적으로 장성하고 학습을 통하여 지식을 익히고 직장에 나아가 지위와 명예를 얻고 부(富)를 쌓으며 결혼을 하고 안정적 가정을 얻는 등의 성취를 이루는 시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정오 나이가 되면 문득 삶의 권태와 허무를 느끼면서 방황하게 된다는군요.

이게 흔히 말하는 중년의 위기라고 생각됩니다. 이 위기를 피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페르조나(가면의 인격, 외형의 겉 인격)에 좌절하거나 안주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실한 자기 내면의 인격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융이 말하는 이른바 자기(self)실현이지요. 융을 보면 인생의 참 공부가 나이 40, 중년의 허무와 방황을 거치면서 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하!’ 대종사께서 나이 40이 되면 죽어가는 보따리를 챙기라 하신 뜻이 이 말씀이구나. 혹시라도 나이 40이면 삶을 접고 죽을 준비하라는 뜻으로 생각하시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사는 것이 중년이후 인생을 철나서 공부하고 철나서 사는 것 아닐까요?

저는 이 글을 보면서 우리의 수행이 정직하고 진실해야 하겠구나 하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가면으로 가린 허울과 같은 인격, 금강경에서는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다 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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