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산성 성벽에 공사 관계자 이름새겨

청주 상당산성(국가사적 212호)이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으로 축조됐는지는 아직 명확히 규명된 것이 없다. 다만 역사학자들 사이에 '백제 상당현설', '신라 서원경설', '궁예 도읍성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

백제 점령기간 중의 청주 지명은 '상당'(上黨)이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도시명과 산성 이름이 같은 점을 들어, 이때 상당산성이 처음 축조됐다고 보고 있다.

반면 '신라 서원경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과거 상당산성에서 '沙梁部'(사량부)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된 점을 들고 있다. 이들은 이 명문기와를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고, 이를 상당산성 최초 축조 시기로 보고 있다.

'궁예 도읍성설'은 승장 영휴(靈休)가 쓴 '上黨山城古今事蹟記'(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서 비롯되고 있다.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는 궁예가 상당산성을 도읍터로 정했고, 이후 견훤과 왕건이 뒤따라 상당산성을 접수했다는 기록이 등장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언급은 일반인도 어느정도 알고 있는 내용으로, 새삼스러운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산성에는 일반인이 거의 모르고 있는 역사적인 정보가 있다.

차용걸 교수가 이끄는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는 지난 1999년 상당산성 일대를 정밀 조사했다. 조사팀은 이 과정에서 상당산성 일부 성벽에 사람이름, 숫자, 관직명 등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총 11개의 각자(刻字)된 명문이 발견됐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언뜻 생각하면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석공들이 자기이름을 새긴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각자된 이들 명문은 조선시대 '공사 실명제'와 관련된 징표들이다.

▶숫자 '三'· '四' ▶'牌將閑良'(패장한량)·'都監'(도감) 등 관직명내지 신분표기명 ▶'忠州'·'鎭川' 등의 지명 ▶그리고 '趙洸錫'·'梁德溥' 등 여러 명의 이름이 이에 해당하고 있다.

지역사가들은 이중 숫자 三, 四를 공사구간을 표시해 놓은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도 대규모 공사를 하면 1구간, 2구간 등으로 공사구간을 분할하는 것이 보통이다.

'牌將'은 지금으로 치면 세칭 '노가다 십장'에 해당하고 있다. 현재 노가다 십장은 비정규직이면서 인부들은 통솔하는 권한이 주어져 있다.

당시도 서자출신 지역 양반인 '한량'에게 이같은 권한을 맡긴 것으로 지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이밖에 都監은 정규적 관리이면서 주로 보수관리를 맡긴 것으로 보고있다.

청주에 위치하는 산성에 충주, 진천 등의 지명이 새겨져 있는 것은 다소 의외다. 이는 상당산성의 전략적 중요성과 관련이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상당산성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왜군들은 부산을 돌파한 후 거의 논스톱으로 한양까지 진격했다. 숙종은 이를 거울삼아 외침세력의 중간 저지용으로 상당산성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지금 남아있는 성벽은 이때 축조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당시 청주병영은 상당산성 정비작업이 국책사업인 점을 감안, 충주 진천 등에서도 석공을 동원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름과 관련해서도 재미난 현상도 발견되고 있다. '趙洸錫'이라는 인물에는 '牌將''과 '都監'이라는 두 개의 직함이 서로 다른 성벽에서 보이고 있다. 이는 조광석이 비정규직인 노가다 십장으로 근무하다 정규직인 도감으로 승진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밖에 '梁德溥'(양덕부)는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상당산성 성문을 열어준 인물로, 사료에도 언급되고 있다. 당시 조정은 축조후 성벽이 무너질 경우 공사 책임자에게 이를 추궁하기 위해 공사 실명제를 도입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평범해 보이는 상당산성에는 이처럼 재미난 사연이 담겨져 있다. 또 상당산성은 건축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청주시는 상당산성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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