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 여싯여싯 질겨서
지난 겨울 큰 추위에도 얼어죽지 않고 무사히 보냈습니다
그러나 삼한사온 없어진 그런 겨울 백 번만 살면
너도 나도 겨울처럼 산처럼 깊어지겠습니다
추위로 사람이 얼어죽기도 하지만 사람이 추위에 깊어집니다
우리나라 사람 좀더 깊어야 합니다
드디어 묘향산만큼 깊어야 합니다
장마 고생이 가뭄만 못하고
가난에는 겨울이 여름만 못한 것이 우리네 살림입니다
이 세상 한번도 속여본 적 없는 사람은 이미 깊은 사람입니다
그런 순량한 농부 하나둘이
긴 겨울 지국총 소리 하나 없이 살다가
눈더미에 묻힌 마을에서 껌벅껌벅 눈뜨고 있습니다
깊은 사람은 하늘에 있지 않고 우리 농부입니다
아무리 이 나라 불난 집 도둑 잘되고
그 집 앞 버드나무 잘 자라도
남의 공적 가로채는 자 많을지라도
긴 겨울을 견디며 그 하루하루로 깊어서 봄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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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 시집『조국의 별』(창작과비평사) 중에서

꽃샘추위 대단하여 다시 연못물이 얼고 눈발 몰아쳐 일찍 핀 산수유꽃 오그라붙게 해도 봄은 온다. 눈보라에 얼었던 나뭇가지 위에서 연두색 모과나무 꽃 순이 올라오고 있는 게 보인다. 고은 시인의 말대로 "긴 겨울을 견디며 그 하루하루로 깊어서 봄이" 온다. "삼한사온 없어진 겨울", 이제는 한 사흘 추우면 사나흘 따뜻한, 공평한 겨울이 사라진지 오래다. 이월에 꽃 피다가 삼월에 눈 뿌리곤 한다. 그런 겨울을 무사히 보낸 것도 다행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겨울을 한번 보낼 때마다 깊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어떻게 해야 겨울을 지내며 깊어질 수 있을까. 추위와 시련과 고난을 견딜 줄 알아야 한다. 외롭고 어려운 시절을 살아낼 줄 알아야 한다. 단절과 고립을 이길 줄 알아야 하고, 두려움 앞에서 의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산처럼 깊어질 수 있다. 가볍게 처신하지 않고, 이익을 좇아 행동하지 않아야 하며, 무엇보다 고요해야 한다. 그리고 정직해야 한다. "이 세상 한번도 속여본 적 없는 사람은 이미 깊은 사람"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깊은 사람은 하늘에 있지 않고 대지의 사람 중에 있다. 울음도 알고 웃음도 알면서 겨울을 이기고 봄을 맞이할 때마다 깊은 충만으로 차오르는 사람. 그런 환한 사람, 그렇게 빛나는 사람들로 인해 봄이 오는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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