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대처정부의 강력한 구조조정에 맞선 광산파업이 한창인 1984년 영국 북동부 더램지방.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쓰던 권투 글러브를 들고 체육관에 간 11살 소년 빌리는 그러나 권투엔 영 소질도, 흥미도 없다. 소년의 영혼을 휘어잡은 것은 그러나, 발레. 잿빛 구름과 파업의 거친 열기 속에서 발레를 향한 소년의 은밀한 욕망과 헌신적 애정은 발레학원의 윌킨슨 부인 지도 아래 점점 커져간다.

"남자는 권투나 축구, 레슬링 같은 걸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완고한 반대와, 어머니의 유품인 피아노마저 부숴 땔감으로 써야할 곤궁한 처지도 이 소년의 비상하고픈 꿈을 막지는 못하는 것이다. 파업성공에 대한 확신 없이 우울했던 크리스마스날, 흐린 체육관 불빛 아래 '새처럼 날고 싶은' 아들의 간절함을 드디어 알아낸 아! 버지는 동료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아들의 꿈을 지원하고자 한다. 가난한 이웃들의 성원과 잔돈푼마저 모아 드디어 로열발레학교에 입학하게 된 빌리.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아버지와 형 토니, 어릴 적 단짝 친구 마이클이 지켜보는 앞에서 청년 빌리는 한 마리 백조가 되어 하늘로 높이 날아오른다.(2) 빌리 엘리어트(2000)
처음 메가폰을 잡은 연극연출가 스티븐 달드리와, 2천 대 1의 오디션에서 발탁된 제이미 벨(빌리), 게리 루이스(재키), 줄리 월터스(윌킨슨 부인) 등 참여한 모든 이들의 놀라운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된 '빌리 엘리어트'(2000)가 감동적으로, 그러나 가슴 아프게 그려내는 건 '아버지의 패배서사'다.

탄광이 없으니 런던엔 갈 일조차 없는 삶을 살았던 빌리의 아버지-탄광 노동자 재키는, 자신의 아버지가 끼던 권투 글러브를 소중히 간직했다가 아들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어려운 세간에도 꼬박꼬박 50센트의 권투 학원 수강료를 내주는 것으로 '아버지의 아들'/'아들의 아버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정말 몰랐다. 고작 열한 살 어린 아들의 가슴을 감전된 것처럼, 불붙은 것처럼 뜨겁게 만들어 새처럼 날아가게 만드는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그는 아내의 피아노를 크리스마스 땔감으로 태워버리면 아들의 가슴 속에서 미세하게 이어지던 어떤 울림을 그치게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집 바깥의 또 다른 '(유사)어머니'-윌킨슨 부인-의 밝은 눈이 있어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아들의 천재성을 기어코 끄집어내게 될 줄은 몰랐었다. 비록 부유하지는 않지만 단란했던 가정과, 탄광노동자 남성으로 강하게 연대했던 지역/노동공동체 속에서 나름대로 안온했던 그의 삶이 사정없이 뒤흔들리는 현재의 위기와 이러한 뒤늦은 깨달음이 함께 올 때, 그는, 어깨를 심하게 흔들며 울 수밖에 없다.

자신의 피와 살점을 떼어내 세상에 내어놓고 키운 아들을 지금 무엇이 이끌고 있는지,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전혀 종잡지 못한 무기력 속에서도 아버지는 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아버지의 자리를 마침내 지킨다. "발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물음엔 제대로 답하지 못했지만 "전폭적으로 지지하시겠습니까?"에는 "그럼요, 물론이죠" 확신에 차서 말한다. 비록 그 '전폭적 지지'가 동료들과의 연대를 파기하는 '더러운 배신자' 낙인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 답만은 우물거릴 수도 없고, 부인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무릇 자신의 앞길을 막는 아버지를 아들들은 교묘히 우회하거나 기어코 제거해서라도 제 길을 간다. 그렇다면 '살부(殺父)의 파국'을 면하는 유일한 길은, '억압자'의 자리를 떠나 '전폭적인 지지자'로의 이동을 통한 '화해'만이 있을 뿐. 일대 일로 사내답게 싸우며 한 방 날리는 아들 대신 토슈즈를 신고 끊임없이 하늘로 솟구치는 아들, 탄광 노동자의 삶 대신 발레리노가 된 아들을 수긍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빌리 엘리어트'는 그저 뭉클한 감동으로 기억되기에는 너무 가혹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미래를 위한 소중한 기회가 빌리에게 허락되던 그 날, 조합은 항복을 선언한다. 더 넓은 세상,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하기 위해 빌리가 런던행 버스에 오를 때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는 어두운 갱도 속으로 하염없이 '내려간다'. 그 '하강'의 이미지가 어른 빌리(아담 쿠퍼)의 환상적 '도약'으로 이어지며 선명하게 대비될 때, '백조가 된 탄광촌 미운오리새끼의 동화'는 그저 동화이기만을 멈추고 현실의 절박한 기운을 고스란히 품는 것이다.

하얀 눈 소복이 쌓인 크리스마스 밤의 추운 체육관. 흥건한 술기운에 젖은 아버지 재키와, 친구 마이클과의 흥겨운 춤동작에 몰두하던 아들 빌리는 노란 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선다. '당신의 아들은 당신의 아들이되 당신의 아들이 아님'을 온몸으로 절규하던 빌리를 보며 아버지는 뒤돌아서 눈물을 훔치며 달린다. 그리고 아들의 아름다운 비상을 보며 또다시 흐르는 눈물…. 세상의 아들들은 자신이 아비가 될 때까지 알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의 눈물이 있어 자신이 비상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아들의 비상이 있어 아버지의 패배는 그저 패배가 아니라는 것을. 박인영 /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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