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도쿄의 한 주택가 2층에 싱글 맘 게이코(유)가 이사를 온다. 집주인에게는 아들 아키라(야기라 유야)뿐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셋이 더 있다. 조신하고 착한 교코(키타우라 아유), 먹성 좋은 장난꾸러기 시게루(키무라 히에이), 아폴로 초코를 좋아하는 어린 천사 유키(시미즈 모모코). 각자 다른 아버지를 둔 네 명의 아이들은 호적에도 올라있지 않고 학교에도 다니지 않는다. 작은 아파트에서 다른 사람 눈을 피해 살아가던 네 아이들을 두고 곧 돌아온다는 약속을 남긴 채 엄마가 떠난다. 열 두 살짜리 아키라가 동생들을 먹이고 씻기고 달래며 아이들만의 공동체는 나름의 질서가 ! 잡히고 소박한 즐거움도 찾아든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돈은 떨어지고, 전기도 수도도 가스도 들어오지 않는 궁핍한 생활에 아키라부터 지쳐간다. 결국 번잡한 도시 속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아이들의 공동체는 끔찍한 슬픔을 맞는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을 지내며 두어 뼘쯤 훌쩍 키가 큰 아이들은 셋으로 줄지만, 다시 네 명이 되어서 함께 길을 간다. 아무도 이들의 존재를 모르는 도시의 아스팔트길을.

누가 이 아이들을 보셨나요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싶어한다. 아키라는 야구를 하고 싶고 교코는 피아노를 치고 싶다. 하지만 엄마는 단호하다. "학교 가봐야 아빠 없다고 왕따만 당할 것"이며, "학교 나오지 않고도 훌륭한 사람은 세상에 많다"는 것이다. 이토록 이상한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이 넷은 각자 아버지가 다르고 호적에도 오르지 않았다.

아이들을 보면 부모를 알 수 있다는데, 게이코의 네 아이들은 하나같이 착하고 밝고 예쁘고 바르다. 그러니 어찌어찌 아이 넷을 낳아 혼자 키웠던 싱글 맘의 애정과 헌신을 쉽게 폄하할 수도 없어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들을 방기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지만,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이 아이들의 비극의 유일한 원천으로서 엄마 게이코만을 지목하는 건 어쩐지 부당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그녀가 왜 떠났을까 묻거나 어쩌자고 돌아오지 않았을까 묻기보다, 그 모든 것에 앞서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를 물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서 '아무도 모른다'(2004)의 진정한 슬픔이 드러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지난 1988년 실제 일본에서 발생했던 '나시 스가모의 버림받은 4남매 사건'을 10여 년간 삭혀 만든 이 영화는, 가정이 개인과 사회 간의 중재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그 연결이 끊어졌을 때 필연적으로 닥치게 될 비극을 너무도 선연하게 그려낸다.

아마도 아키라를 낳았을 무렵이나 그 후 얼마동안은 남자/남편과, 가족의 제도적 구성에 대한 신뢰를 지녔을 법한 게이코는 아키라 아빠가 갑자기 사라져버렸을 때, 그리고 교코, 시게루, 유키를 차례로 낳으면서 아마도 비슷한 경험을 반복하는 동안 어떠한 기대도 포기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듯 여자와 남자가 서로의 어깨를 빌려가며 알콩달콩 살아간다는 동화 속 해피엔딩의 꿈이 스러지면서 호적 등록이니 학교 입학이니 하는, 그 꿈을 사회적으로 승인받기 위한 절차 또한 무의미해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온전히 자신과 자신의 핏줄로만 구성되는 자족적인 공동체를 꾸려 나가지만 당연하게도 이 과감하되 무모한 도전은 패배한다. 그렇게 숱한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또 다시 '행복해지기'를 꿈꾸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아마 그녀는 도망가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여자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현실이었으므로.

따라서 도망갈 수 없는 아이들만 고스란히 남아 가혹한 삶의 채찍을 감당하게 된 것은, 가슴 아프지만 당연한 귀결이 된다. 아무리 아키라가 성실한 가장노릇을 한다 해도, 아무리 교코가 참한 살림꾼 역할을 마다 않는다 해도, 아무리 시게루가 말썽꾸러기 작은 아들 역할을 감칠맛 나게 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이들 앞에 어김없이 다가오는 불행을 막기에는 유키의 천사같이 맑고 순수한 눈망울로도 불가항력인 것이다.

절망적인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아이들은 일종의 '유령'이 되어 고군분투한다. 예쁘게 단장한 강아지와, 공원에서 이루어지는 부자간의 야구 놀이, 예의 바른 이웃 간의 소통으로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가는 현대 도시에서 이들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눈보라 치는 겨울날 얇은 옷을 입거나, 구멍이 숭숭 뚫린 더러운 옷에 까치집을 머리에 지은 아이들이 공원을 뛰어다니고 거리를 거닐어도 누구도 이들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도 모른다'의 세상은 '유령들'이 살아가는 곳이 된다. 퀘퀘한 냄새 속에서도 꽃을 피웠던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유령과도 같았겠지만, 정작 자박자박 발소리와 뽁뽁이 슬리퍼 소리를 듣지 못했던 어른들과 사회가 아이들에겐 무시무시한 유령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출구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은 잠시 접어두고 고민해야 한다. 어찌하면 우리가 서로에게 유령이기를 멈추고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를. 무모하고 어리석고 이기적이면서도 어이없이 맑아보였던 '개념 실종'의 엄마, 게이코역을 맡았던 에하라 유키코의 예명과 영어 이름 '유/You'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박인영 /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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