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화인물 (31) 박영대 화백

긴 여정의 드라마와 같은 송계 박영대 화백의 보리사랑. 청주방송 창사 10주년 기획으로 오는 27일까지 대청호미술관에서 열리는 박영대 초대전에는 작가의 초기작품에서 실험을 거듭한 최근작까지 30여년 역사의 흐름이 자리하고 있다. 전시에 맞춰 발간된 첫 화집 역시 보리라는 삶과 작업의 일관성 속에 조형적 기법을 달리한 작품이 시간의 거스름 없이 작가의 내면을 비추고 있다.

사실 박영대 화백(66)의 작품은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가 있다. 대학에서 은행에서, 공공기관에서 약간의 과장을 보태 그의 그림으로 도배했다할 만큼 많은 그림들이 대중을 만나고 있다. 그는 청주시를 큰 의미의 열린 미술관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소년, 화가의 꿈을 키우다

청원군 강내면 월탄리 집성촌으로 이뤄진 화가의 고향은 그림의 정서를 지탱하는 밑바탕이다. 미호천 주변에서 바람에 일렁이는 밀밭과 보리밭은 소년 박영대의 가슴에 자연의 조형성과 구상성을 안겨줬다. 1969년까지 계속된 시골생활의 감성은 이후 청주상고(現 대성고)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도 그대로 이어졌다고 한다.

사실 고등학교때까지만 해도 박영대는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소년이었다. 강내초등학교에서 특별활동을 하며 미술반 활동을 시작한 이후 담임선생님의 수채화와 정물화 그림을 어깨너머로 보며 그림에 대한 꿈을 키웠다.

"싸움도 할줄 모르고 운동도 잘 못했어요. 아주 둔해서 뜀박질을 하면 꼬지로가고 한바쿠는 떨어져 갔지. 철봉에 매달렸다가 늑막염에 걸려서 고생도 하고..어리숙하기 이를 데 없었어요. 재능이라는 것이 한쪽만 발달하는 건가봐. 말도 잘 못하고 수줍음이 많았는데 그림은 곧잘 그렸으니까."

은행원의 꿈을 키우길 바랐건만 화가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아들에 대해 노부모의 근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당시만해도 그림 그리는 사람은 '제대로 취급도 안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친구들은 홍익대며 서울대, 서라벌예대를 진학했건만 상고 미술반장을 맡았던 박영대 만큼은 노부모와 동생 건사하느라 농사를 지으며 충북 최초의 관인미술학원인 일신미술학원을 운영하게 된다. 이후 고등학교 교사 자격 검정고시로 독학을 해서 학교에 자리를 잡아 지낸 시간이 9년 6개월, 햇수로 10년이다. 그리고 이 즈음 보리가 그의 화폭으로 들어온다.

#왜 사실보리를 안그리시죠?

청맥과 황맥 등 사실보리 작가로 이름 알리던 시기가 1970년대. 국전보다도 어렵다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최한 백양회 공모전 대상을 수상한 것이 1978년, 그의 작품에 변화가 찾아온 것도 이때다.

"청맥으로 대상을 받았는데 그것은 계속한다는 것은 작가로서 양심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맷방석을 시작했지. 보리와 연결되는 여찔금을 그리고 보리이삭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보리달을 그리면서 보리와의 인연은 놓지 않았어요."

사실보리에서의 변화는 시련도 가져다 줬다. "박영대하면 사실보리인데 왜 좋은 그림을 안그리냐를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작가적 양심을 지켜가는 일은 실험과 외로움을 동반했다. 그러나 작가는 확신했다고 한다. '단순한 모방에서 벗어나 형태를 깨부수고 재구성하며 내 그림은 진화를 하고 있다'

1981년 뉴욕 초대로 16개국을 순회하며 가진 세계일주는 작품 변화에 직접적 영향을 줬다. '사실보리나 사실적 맷방석으로는 세계무대에 설 수 없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손바닥만한 그림이라도 세계적 미술관에 걸릴 수 있는 한점의 그림을 완성하자는 목표가 생겼다.

서양화 그림에 동양화 필력과 먹, 채색이 깃든 것은 그때의 깨달음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문인화 정신으로 필선에 자유로움을 부여하며 먹을 자유자재로 그려넣은 작품은 색채에 추상성을 또 담묵에 색을 입힐 수 있었다.

'버려야 새로운 것을 얻는다'는 이론적 무장은 사실 주변 사람들의 반응보다 작가 스스로의 고통 속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사실에서 추상으로 변한 작품은 컬러플한 작품으로 작가 스스로에게 즐거움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줬다.

바뀐 그림의 즐거움은 음악의 리듬에 해당한다. "마치 강약을 조절하듯 그림을 그리는 데 이건 하루아침에 나온 것은 아니야. 오랜시간 명상을 통해 하나하나의 점에 해당하는 생각들이 모여서 함축된 지론으로서의 그림이 완성되는 거에요."

#보리사랑은 실험으로 완성된다

문인화의 장점, 필선의 자유로움, 형체의 단순화와 추상성. 박영대의 그림을 수식하는 단어는 더욱 많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그는 그 수식에서 더욱 더 멀어지길 바란다.

마치 유희하듯 리듬을 타고 있는 작업의 힘은 작가 자신의 즐거움. 가장 단순하고 강하면서도 시원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작가는 10번의 터치보다 원터치로 리드미컬한 형상의 묵화를 친다.

1970년대 사실보리에서 시작해 1980년대 대상을 해체하고 강렬한 채색으로 수묵화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그는 1990년과 2000년에 접어들며 수묵담채로 재료를 전환해 문인화의 새로운 경지를 탐닉했다. 그리고 2000년 태소 시리즈는 보리와 고향에 대한 정취를 기저에 깔고 완전한 추상상태로의 진입을 시도한다. 보리사랑 50년. 이순을 넘어 만든 화집의 의미를 묻자 작가는 쉼표를 찍는다.

"오늘의 그림을 내일도 똑같이 하고 있다면 예술은 죽은 것이 됩니다. 양파껍질 벗기듯 계속해서 벗겨내는 작업을 해야지. 내 최대의 적은 바로 나인 이유도 자신과의 투쟁을 통해 새로운 작품이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화집 발간은 그동안 구축한 작품의 발자취를 정리하자는 의미가 큽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깨부수면서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고 싶어요. 이제 나는 다시 초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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