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부르는 노래

▲ 한 때 절정의 음악세계를 선보였던 로커 리(제임스 존스턴)와 그의 아내 에밀리(장만옥)는 음반 취입조차 쉽지 않은 현재를 마약으로 견뎌낸다. 공연 중이던 캐나다 해밀턴에서 자신들의 음악적 전망에 대해 언쟁을 하던 에밀리는 혼자 모텔을 나와 호숫가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하지만 돌아와 보니 리는 마약과용으로 이미 싸늘한 시체가 돼있다. 에밀리 또한 마약 소지 혐의로 6개월 형을 살고 나오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세상의 냉대 뿐. 어린 아들 제이를 맡아 키우는 시아버지(닉 놀테)도 당분간 제이를 만나지 말라고 못 박는다. 결혼하기 전 생활하던 파리로 간 에밀리는 친척 식당과 백화점 등에서 일을 하지만 여전히 약을 끊지 못한 상태. 음악적으로 재기하고 싶어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 또한 쉽지 않다. 제이를 만나고 싶어하던 에밀리는 시아버지 배려로 제이를 만나게 되지만, '아들 죽인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의 원망을 닮아 제이도 엄마를 비난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마약중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둘 사이에 놓인 벽이 조금씩 무너지는 걸 느낀다. 시아버지 또한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에밀리의 변화와 새 출발을 격려한다. 곧 제이와 함께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에밀리는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음반 취입을 위한 노래를 부른다. 제이를 낳고 리와 한없이 행복했던 그 곳에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왜 잘못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생각의 실타래가 풀려가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이 다 엉키고 헝클어져서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절망의 끝에 에밀리가 서 있다. "제발 꺼져주면 좋겠어" "리의 인생에 너란 여자가 문제야" "5년간 그 여자 덕에 되는 일이 없었어" "너 때문에 우리까지 문제야"…. 냉대와 비난, 숙덕거림의 손가락질 말고는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다.

한 때 장만옥과 부부의 연을 맺기도 했던 프랑스 감독 올리비에 아싸야스가 연출한 캐나다, 프랑스, 영국 3개국 합작 영화 '클린'(2004)의 이야기는 모든 것이 깨지고 사라져버린 '끝'에서부터 시작된다. 파국의 끝, 캐나다의 해밀턴에서 한 발짝씩 되짚어 프랑스 파리로, 다시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로 이어지는 에밀리의 여정은 그 모든 것이 시작됐던 '처음'을 찾아간다. 그리고 이는 어린 아들 제이로부터 받게 될 질문-"정말 엄마가 아빠를 죽였나요?…왜 마약을 했나요?…그건 나약한 게 아닌가요?"-에 답을 준비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엄마를 추궁하고 비난하는 아들의 질문을 받으러 가기까지의 그 길은, 파국으로 내몰리고 그 무한한 절망의 바다 속에 혼절하다시피 잠겨있을 때보다 더욱 힘들고 고통스럽다.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제대로 된 일'을 구하기 위해 이 악물고 '변화'를 다짐하지만 "사람은 안 변해" 내뱉던 친구의 냉소를 부인하기엔 힘이 빠진다. 무엇보다도 약과 처방전을 버리고서도 여전히 다시 약을 삼켜야만 숨 쉴 수 있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이야말로 참담한 것이다.

그럴 때 에밀리를 다시 한 번 일어서게 하는 건 "용서를 믿는다"던 시아버지의 한 마디다. 어처구니없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깊은 오열을 억눌러야했던 아버지인 그는, 희망을 잃은 아내의 병든 육신 앞에서 며느리와 손자가 함께 헤쳐 갈 시간들을 숙고한다. 그리고 그의 깊은 측은지심과 인간에 대한 신뢰 덕분에 끝 모르던 에밀리의 자기연민과 정처 없는 유랑은 드디어 잦아들게 된다. '마음에 안 들어도 적응해야만 하는 우울한' 삶이 아니라, '좋아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삶 또한 욕심낼 용기와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음악에 대한 열정에만 들떴던 젊은 에밀리와 리 부부가 핏덩이로 시부모에게 던져두고 외면했던 아들 제이의 앞에 서면서, 그리하여 결국 그토록 두려웠던 질문을 받게 되면서 에밀리는 이제 어른이 된다.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었지만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며 고통스러웠던 과거와 초라한 현재를 수긍할 때 그녀는 비로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한 인간으로, 엄마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그녀는 남편 리의 부재를 고통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혼자 남은 자신을 팔로 안아주고 "별 일 없다"고 말해주는 이는 없지만, 어린 어깨를 안아주면서 "별 일 없다"고 말해주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아들이 자신의 옆에 있기 때문이다. 그 아들을 혼자 두어 외롭게 하지 않기 위해, 그가 필요로 할 때까지 언제나 옆에 있어 줄 '보호자'가 되기 위해 그녀는 다시 한 번 아들의 손을 놓고 샌프란시스코로 떠난다.

황량하기만 한 캐나다 해밀턴 공장지대에서 시작된 영화 '클린'은 푸른 나무 우거진 샌프란시스코 바다의 풍경으로 끝난다. 연신 하늘로 뿜어져 오르던 굴뚝의 어두운 연기는 사라지고 먼 바다의 표면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잠시 녹음을 쉬고 커피 잔을 손에 든 그녀의 얼굴 또한 보던 중 처음으로 해맑다. 그녀 노래 가사처럼 그녀는 "빛 속에 있기" 때문일 것이며, 핼멧 하나씩 나누어 쓰고 제이와 함께 스쿠터로 전 세계를 유랑하는 꿈을 꾸기 때문일 것이다. / 박인영·영화 칼럼니스트





에밀리를 다시 한 번 일어서게 하는 건 "용서를 믿는다"던 시아버지의 한 마디. 어처구니없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깊은 오열을 억눌러야했던 아버지는 희망을 잃은 아내의 병든 육신 앞에서 며느리와 손자가 함께 헤쳐 갈 시간들을 숙고한다. 그리고 그의 깊은 측은지심과 인간에 대한 신뢰 덕분에 끝 모르던 에밀리의 자기연민과 정처 없는 유랑은 드디어 잦아들게 된다. '마음에 안 들어도 적응해야만 하는 우울한' 삶이 아니라, '좋아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삶 또한 욕심낼 용기와 기회를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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