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정유감>

박천호 / 시인

올해도 어김없이 오월은 돌아옵니다.

오월, 그 찬란한 신록자락에 어버이날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말 '어머니'가 있습니다. 오늘 새벽에도 정정한 발길로 새벽 기도를 가시는 어머니, 지금까지 수 천 수만 번의 기도는 오직 자식들의 건강과 평안을 위함이었습니다. 손자들 공부시킨다고 이사하는 바람에 정든 고향 마을을 떠나 할 수 없이 따라나선 어머니, 논둑길 밭둑길 걸으며 나물캐던 일에 익숙하던 일상에서 도시의 고층 아파트 생활은 무척이나 낯설었을 것입니다.

간장 독
된장 독
고추장 독
제법 구색 갖춘
어머니의 장독대

고추잠자리 날던
고향 하늘 그리워
아파트 거실에 차렸는데

하지만 저걸 어쩌나
어머니 살가운 손맛 못내는
된장이여, 고추장이여

그나마 제 몫 한다면
서해바다 해풍에 말린
반짝이는 소금뿐인데

햇살 들지 않는 거실
부글부글 애꿎은 속만 타는
어머니의 장독대

- 拙詩 어머니의 장독대 전문

어머니는 이곳에 와서도 손수 장을 담그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사 올 때 챙겨온 작은 항아리에 재래시장에 가서 사온 콩으로 메주를 삶아 담았지만 발효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아파트에서 장 담근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결국 몇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장 담그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온갖 푸성귀들이 심어져 있던 시골마당 텃밭, 고추잠자리 날던 파란 하늘, 담 밑으로 돌아가며 핀 봉숭아며 과꽃, 장독대 항아리 뚜껑을 열면 구수하게 익어가던 된장과 빛깔 선명한 고추장이 눈에 선할 뿐입니다. 부글부글 속이 탄 것은 장독대가 아니라 바로 어머니 속이었습니다.

어제는 학교 운동회 날이었습니다. 손자들이 다 커서 어머니는 이제 학교 올 일이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아파트 창문 열면, 바로 코앞에 내가 근무하는 학교가 있어, 지금쯤 혼자 이곳을 바라보고 계실지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를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는 혼자 점심도 거른 체 집에 계셨습니다.

학교 식당에서 마침 점심으로 비빔밥을 준비하였습니다. 워낙 나물을 좋아하시기에 오시라고 했더니 어머니께서 학교로 오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닌 시절로 거슬러 오르면 자그마치 사십 년만의 학교 나들이인 셈입니다. 어쩌면 사십 년 전 그날, 어머니는 운동장 한쪽에서 제가 달리기 할 때 가슴 졸이며 응원하셨겠지요? 아들 먹인다고 정성껏 준비한 점심도시락을 예쁜 보자기에 싸갖고 말입니다. 어머니는 그날 비빔밥 한 그릇을 다 드셨습니다. 모처럼 아들이 근무하는 학교에 오셔서 그런지 기분이 무척 좋으셨습니다. 교무실에 들러 제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장하다. 이 의자가 내 아들 것이라니, 정말 고맙구나."

모처럼 어머니에게 비빔밥 한 그릇의 효도를 했습니다. 이젠 계단조차도 조심스럽게 내려가시는 굽은 허리가 안쓰럽지만, 어머니가 계시기에 오월의 신록이 더욱 푸르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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