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최영희 / 청주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장

여성의전화는 지난 10여년 동안 구타당하는 여성들을 위한 인권운동을 해왔다. 이를 통하여 가정폭력(신체적 폭력)의 심각성이 사회적으로 대두되고 문제시되었다. 그러나 이 여성들은 상담을 통하여 신체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정서적, 성적, 경제적으로도 심각한 학대를 경험하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아내구타 여성들은 '신체적인 폭력보다 더 고통스럽고 모욕적인 것은 폭력후의 강압적이고 강제적인 성관계'라고 고통을 호소하였다. 남편으로부터의 성폭력은 매우 심각한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신체적, 정서적 학대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거나 스스로 드러내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여성의전화연합(2002년) 폭력가정 내 성학대 실태조사에 따르면, 남편의 강제적인 성관계 61.2%, 폭력후 원하지 않은 성관계를 요구하거나 갖는 경우 55.9%로 나타났다.

또한 이 수치는 한국여성의전화(1992년)가 쉼터이용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수치보다 약 2배이상 높게 나타났으며, 1995년 외국 보스턴 지역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보다 6배 높은 수치를 보였다. 이처럼 우리사회의 아내강간 문제는 매우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지역 폭력피해여성을 위한 쉼터에서는 대개 10명중 2-3명은 남편으로부터의 강제적인 성관계가 거의 매일 일어나고 있음을 보고하였는데, 이 여성들은 자신들이 기억하는 가장 심각했던 학대를 남편의 강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거의 매일이라고 말하지 않는 피해 여성들까지 포함한다면, 사실상 대부분의 아내구타 피해여성들이 신체적인 구타와 함께 강제적인 성관계를 경험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폭력 가정내에서 남편의 성폭력 문제는 단지 피해여성의 어려움과 고통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자녀들이 성폭력의 또 다른 피해자가 되거나, 어머니의 피해 장면을 목격함으로써 심리적인 충격과 함께 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되면서, 폭력은 재생산된다.

우리나라는 1970년 '부부간에 강간죄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대법원판례 이후, 1990년대에 제정된 성폭력특별법, 가정폭력방지법에도 아내 강간문제는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4년 서울지방법원에서 폭력을 동원해 아내를 성추행하고 상해를 입힌 남편을 유죄판결한 사건과 또 그 이후로 남편이 아내강간혐의로 구속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적으로 신체적인 폭력의 심각성을 인지하더라도,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아내 강간 및 성학대 문제는 인권침해나 범죄로 인식하기보다는 순결, 도덕의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차피 이미 훼손된' 여성인 아내에 대한 성적 폭력은 대개 사적영역으로 취급되고, 부부간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일로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이러한 사회인식과 법제도의 미비는 아내강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약화시킴과 동시에, 피해 여성과 피해자녀를 양산하는 가정은 사회의 구성단위가 아니라, 또 다른 유형의 인권의 사각지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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