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유명 호텔 레스토랑 주방장으로 일하는 주선생(랑시웅)은 16년 전 아내를 잃고 딸 셋과 살고 있다. 딸들의 부엌 출입을 엄금한 채 일요일 저녁 만찬을 불문율로 지켜온 그는 최근 입맛을 잃고 있다. 딸들과의 관계도 삐걱거려서 산해진미 그득한 일요 만찬은 번번이 엉망으로 끝나기 일쑤다. 특히 자신에게 요리를 배워 누구보다도 각별했던 둘째 가천(오천련)과의 소원함은 더욱 심한데, 항공사 중역인 가천은 분가를 계획하거나 해외 지사 파견의 기회를 잡으려 한다. 하지만 가장 먼저 아버지 곁을 떠나는 건 막내 딸 가령(왕유문).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난 청년과의 사이에 아이를 가졌단다. 노처녀 큰 딸 가진(양귀매)도 화학교사로 근무하는 학교에 새로 온 배구팀 코치와 결혼식을 올려버린다. 하지만 경황없이 딸들을 떠나보낸 주선생의 폭탄선언이야말로 메가톤급이었다. 얼마 뒤, 암스테르담 지사 파견을 앞둔 가천은 아버지마저 떠나버린 집에서 마지막 일요만찬을 준비한다. 아버지와 단촐하게 맞이하는 저녁식사. 부녀는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손을 맞잡는다. 지금은 앙 리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더 친숙한 이 안 감독의 1994년 작 '음식남녀'에서 아버지 주선생은 '살아있는 음식 백과'로 불린다. 중국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건너온 외성인(外省人) 1세로, 40년 동안 중국 전통 요리의 맥을 이어온 명장. 일요일 만찬을 준비하는 그의 집 부엌 벽에는 다양한 모양의 칼들이 즐비하게 걸려있다. 다듬고, 자르고, 볶고, 부치는 정교하고도 집중적인 수작업이 이루어지는 그의 부엌은 딸들의 출입이 금지된 아버지의 공간이며 전통의 공간이 된다. 하지만 그 부엌도 급격한 현대화의 물결 앞에서 더 이상 평화롭지만은 않다. 40년을 한 자리에서 일해 온 아버지의 딸들은 국가의 경계를 자유롭게 무너뜨리는 항공 산업에 종사하거나,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음식을 만들어내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 잡은 오래된 집에 살고 있는 주선생의 딸들은, 수많은 자동차와 오토바이, 자전거가 오가는 번잡한 대로를 숨 가쁘게 달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주선생이 입맛을 잃게 된 건 그러니 어쩌면 당연할 법도 하다. 자신이 그토록 헌신해왔던 중국 전통 요리의 맥은 모두 뒤죽박죽 뒤섞여 전통이고 뭐고 다 없어졌으며 딸들과의 동거 또한 기쁨보다 그늘이 더 길다. 여전히 아침잠을 깨우고 속옷을 빨아 정리해주지만, 9년 전 실연의 상처로 폐쇄적 생활을 하는 큰 딸과 아직 어리기만 한 막내, 그리고 유난히 각별했던 만큼 더 남처럼 느껴지는 둘째와의 소원함에 따른 상실감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천하의 산해진미가 그득하건만, 준비하는 이와 참석하는 이 모두에게 부담스런 형식이 되고만 일요 만찬은 번번이 폭탄선언의 장으로 돌변한다. 막내 가령의 임신과 맏딸 가진의 결혼은 모든 상황이 벌어진 뒤에야 일방적인 통고형식으로 나머지 구성원에게 전달된다. 아버지로서는, 서둘러 짐을 챙겨 택시와 오토바이에 타고 떠나는 딸들을 하릴없이 배웅할 뿐이다. 이 안 감독의 1991년 데뷔작 '추수'(비디오 출시명 '쿵후선생'), 1993년 '결혼피로연'에 이어진 '가족(아버지) 3부작'의 마지막 편인 이 영화에서도 '전통 대 현대'의 대립항은 현대 대만사회 가족해체의 풍경을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튼튼한 심장이 있어 가능했던, 모든 가족들과 친지들을 뒤로 넘어가게 했던 아버지의 놀라운 '반전'은 이 영화를 가족 해체를 다룬 여타의 영화들과 구분하게 만든다. 주선생은, 무심하게 혹은 눈물 흐리며 자식들이 떠나고 난 뒤 쓸쓸히 부채 부치며 허공을 응시하던 '동경 이야기' 속의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간다. 모두가 떠나버린 빈 집에 고립돼서 유령처럼 남기를 거부하고 새롭게 가족을 구성하면서 스스로 집을 떠나는 것이다.

전통과 현대가 일방의 승리와 패배로 귀결되지 않고 상생을 도모하는 이러한 결말은 전통의 상징이자 실체이기도 했던 음식이 있어 가능해진다. 전통음식이 정성스레 담긴 주선생의 도시락은 금영의 딸 산산과 그 친구들의 햄버거 점심을 물리친다. 그리하여 주선생은 젊은 세대에 대한 탄식과 경원을 멈추고 몸과 마음으로 그들을 끌어안는다. 변화의 물결에 주춤주춤 뒷걸음질하기보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나가 맞으며 공생의 화해를 기약하게 되는 것이다.

가천이 부지런히 손을 놀렸던 주선생네 가족의 마지막 만찬에는 아버지만이 참석한다. 암스테르담으로 떠날 가천의 짐이 곳곳에 쌓여있는, 팔려버린 옛 집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그러나 쓸쓸한 퇴락의 느낌으로만 기억되지는 않는다. 아버지에게서 딸에게로 전수된 전통 음식 앞에서 딸과 손을 맞잡고 서로를 따뜻하게 부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잃었던 입맛이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아버지라는 이름의 전통은 자식이라는 이름의 현대와 앞으로도 풍성한 일요 만찬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홀아비와 세 딸만의 식탁이 아닌, 더 많은 식구들이 와글와글 북적이는 식탁에서. 오래된 옛 집이 아닌, 희망으로 시작하는 새 집에서.
/ 박인영·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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