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미술의 허브, 청주' 실현 도전장

오늘의 문화인물 (34) 강호생 동양화가

화가 강호생의 삶과 그림은 여백으로 완성된다. 그의 수묵에는 항상 여백이 자리하고 있다. 붓이 간 흔적으로서의 여백이거나 그렇지 않은 텅빈 공간으로서의 여백까지. 뗄레야 뗄 수 없는 이들 허실 관계를 통해 강호생은 살아 숨쉬는 공간에 희망을 부여한다.

"여백은 마진입니다. 곧 희망이죠. 그림 속에 부분적 여백은 하찮은 듯 여겨지지만 그 텅빈 여백이 전체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쇼 라즈니쉬는 수레바퀴 중심이 텅 비어있음을 이야기했어요. 중심은 텅 비어 있지만 전체를 지탱하죠. 비어 있어야 제 구실을 한다는 겁니다. 그림과 삶도 다르지 않아요. 마음 속에 여백이 없는 인간은, 작가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죠."

작가적 양심을 여백으로 풀어낸 화가는 여백 자체가 이미 숨쉬는 공간이면서 텅빈 충만이고 또한 가벼운 중량감으로 생명력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몸이 약하니 손가락이나 튕겨라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강호생은 만들고 깎는 것을 좋아했지만 몸이 약해 진학한 곳이 청주상고였다. '몸이 약하니 손가락이나 튕겨라'는 선생님의 권유가 계기였다.

그러나 은행원 내지 회사원으로서의 진로는 미술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해 스스로 꺾고 말았다. 졸업 즈음 홍익대는 처음으로 동양화과를 신설해 신입생을 모집중이었는데 충북에서는 처음으로 그가 학과에 입학하며 동양화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지금에서야 털어놓는 에피소드지만 눈에 띄는 그림 실력에도 강호생은 미술대회 수상경력이 별로 없다. "건전지 흑연으로 담장에 그림을 그리고 다녀서 동네 아저씨들이 붙여준 별명이 화가였어요. 그런데 희한하게 실기대회를 나가면 고배를 마셨어요. 제가 지금 심사를 하면서 당시를 생각해보니 너무 잘 그려서 부모가 드려준 걸로 오해하지 않았나 싶어요."

#수묵의 세계에 젖어들다

그가 정식으로 수묵을 접하기 시작한 것은 82학번 홍익대 동양화과에 입학하면서 였다. 당시 수묵화 기수로 통하던 남천 송수남 선생과 문인화가 홍석창 교수, 오창석·제백석·임백련 등 중국 화가들이 그의 작품을 지탱하는 힘이 됐다는 것.

"당시 접했던 중국 화가들의 그림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에 소름이 돋아요. 수묵이란 무엇인지 개안된 것이 대학 2학년때 쯤이었는데 마치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눈이 열리더군요"

양에 차지 않아 전지에 점 하나를 찍고 버리길 여러 번. 점 하나 획 하나에 정신을 쏟으며 불을 밝힌 대학시절은 어마어마한 분량의 그림으로 완성됐고 결국 졸업과 동시에 한국화단면전에 발탁되는 기회를 얻게 된다. 고인이 된 박생광, 운보 김기창, 백남준 등이 전시회를 둘러볼 만큼 한국화단의 오늘을 선보이는 한국화단면전은 사회초년생인 강호생에겐 특별한 행운이 분명했다.

강호생이 청주에 정착한 것은 1992년 말.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며 붓을 꺾는 단절의 시간도 겪어야 했지만 1994년 충북예술고 강사로 활동하며 작품 활동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자유스런 필선의 추상 수묵화

강호생의 수묵화는 1993년 첫 전시부터 지금까지 직관적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외형적인 형태와 방법은 다르지만 수묵의 정신만큼은 변함이 없다는 것.

1회 전시가 평면적 수묵화를 선보인 자리였다면 2회때는 작품을 입체화시켜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착시효과를 주기도 했다. 또 3회 개인전에서는 작품에 우산살 혹은 1rpm모터를 달아 작품 자체에 변화를 줬으며 4회 전시회에서는 문인화적 느낌을, 5회 개인전에서는 타이어를 통해 수묵에 대한 편견을 뒤집으며 수묵은 소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인식의 전환을 불러왔다. 이후 여섯번째로 마련된 프랑스 전시에서는 후로킹이라는 독특한 천 위에 작품을 완성했고 7회에 이르러서는 추상수묵화로 방향을 선회했다.

최근 선보인 설치로서의 숯가루 작업은 먹 이전의 상태, 평면과 입체를 연결하는 오브젝트화된 앞으로의 입체적 작업 경향을 함축하고 있다. 붓의 자유로움과 문인화가 갖는 직관적 태도를 평면적 수묵과 입체적 먹물 그 이전상태로서의 숯의 변화로 집약시킨 전시회로 숯가루 작업은 그가 걷게될 작업의 중심 축을 이루고 있다.

#공부하는 미술인으로 살기

"속된 말로 미대가 백수양성소가 돼서는 안되잖아요. 후배 미술인들과 함께 미술운동을 새롭게 전개하고 싶어요. 카셀이라는 도시처럼 화랑들을 섭외하고 잔치마당을 열어 청주를 아시아적 미술의 가치를 알리는 허브, 청주도큐멘트를 실현해 보자는 거죠."

미술 담론의 장을 만들기 위한 작가와 평론가와 시민들의 끊임없는 공부, 화가 강호생은 자신이 시민들의 눈높이를 끌어올리는 중심이 되길 바란다. 사이버 홈페이지를 구축해 놓은 이유도 더 많은 관람객과의 소통을 위한 노력 가운데 하나. 작가 개인의 PR을 넘어 수묵과 애니메이션의 결합 등 새로운 장르로의 영역 넘나들기 또한 시도하고 있다.

"서양화는 처음부터 탈법이 가능하지만 동양화는 엄청난 수행을 하고 경지에 올랐을때 탈법을 합니다. 그래서 동양화는 선 자체로도 완결성을 갖지요. 필의 속도와 힘, 먹물의 양, 종이바닥이 순지냐 장지냐 화선지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내놓는 것이 동양화고 따라서 수행이 필요한 겁니다"

강씨의 바람은 소재에 국한하지 않는 동양화 그러면서도 무엇을 그리든 강호생다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림에는 격이 함축돼 있죠. 그래서 그림을 보면 사람의 인격을 알아요. 마음을 동하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강씨는 현재 충청북도미술협회 사무국장과 한국애니메이션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