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서 살고 있는 18살의 인도 소녀 제스(파민더 나그라)는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의 열렬한 팬. 실력도 타고나서 멀티 플레이어로 동네 축구계를 휘어잡는다. 어느 날 여자 축구팀 해리어에서 뛰고 있는 줄스(키이라 나이틀리)의 눈에 띈 제스는 테스트를 거쳐 정식 선수가 된다. 하지만 딸이 전통적인 인도여성으로서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엄마의 반대에 부딪쳐 몰래 공을 차야만 한다. 줄스 또한 관대한 아버지와 달리 여성성을 갖추기 원하는 엄마의 극성 때문에 피곤하다.

꿈꾸던 그라운드에서 마음껏 달리게 된 제스는 실력이 일취월장하지만 몰래 하던 축구가 들통 나는 바람에 결혼을 앞둔 언니 핑키가 파혼당하는 사건이 터진다. 게다가 축구코치 조(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와의 사랑 때문에 줄스와의 우정 또한 위기에 직면한다. 우여곡절 끝에 언니의 결혼식이 열리지만 제스는 미국 프로축구팀의 스카우터가 지켜보는 결승전 경기에 나갈 수 없게 된다. 고민하던 제스는 베컴의 프리킥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결국 조와의 사랑을 미래의 가능성으로 남겨둔 채 제스는 줄스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멋지게 프리킥을 날려봐"

소녀들은 달리고 싶다. 푸른 그라운드에서 마음껏. 하지만 축구공과 함께라면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을 것 같은 그들은 아직 새 장에 갇힌 신세. 그럴 때 가족은 따스한 보금자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추장스러운 족쇄가 되기도 하다. '하고 싶은 것들' 대신 '해야 하는 일들'의 목록을 열거하면서 운신의 폭을 좁히고 미래의 청사진을 엉뚱하게 뒤바꾸려 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인도계 여성 영화감독 거린더 차다가 연출한 '슈팅 라이크 베컴'(2002)은 한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자란 이들에게는 특히 낯설지 않다. 어디서고 어렵지 않게 듣던 소리, 혹은 지금도 어디선가 쏟아질 주문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요리를 배워 얌전하게 시집이나 가라" "여자다운 옷차림으로 남자들과 데이트를 해라" "선머슴 같은 애는 남자 친구도 없다"….

여성들의 개입을 탐탁찮아 하는 남성들의 스포츠-라고 이야기되는-, 축구를 꿈꾸는 제스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좀 더 강력할 수밖에 없다. "반 벌거숭이 남자들하고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딸"을 질색하는 엄마는 "요리 하나 못하고 공만 차는 계집앨 누가 데려갈까" 한 걱정이다. 영국이라는 '바다'에서 인도라는 '섬'의 민족적·문화적 전통을 유지하고 계승시켜야 할 책임도 있는데 게다가, 아일랜드계 백인남자와 연애까지 시작했다니 실로 기함할 노릇인 것이다.

결국 제스의 집은 여성성과 남성성, 전통과 현대의 대립, 그리고 인종과 세대 간의 갈등이 하나로 모여드는 문화 충돌, 이데올로기 격전의 장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는 결승전 경기와 핑키의 결혼식의 양자택일 상황으로 귀결되면서 갈등의 최고조에 이른다. 마치 열 명 전원이 밀집수비에 나선 팀을 상대로 골을 넣어야하는 고독한 스트라이커처럼 제스는 험난한 장애물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다.

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은 이처럼 얽히고 설킨 문제들을 푸는 실마리를 베컴의 프리킥에서 찾는다. 원제 'Bend It Like Bekham'이 말하듯,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휘어져 골대 속으로 정확하게 빨려 들어가는 그의 아름다운 오른 발 킥처럼 현실의 문제들에 대처하자는 것이다. 죽기 살기 식으로 혹은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결연한 태도로 장벽들에 부딪쳐 상처받거나 좌절하기 보다는 다소 시간은 걸리더라도, 혹은 기대보다 결과가 초라해진다 하더라도 우회해서 결국 목적지에 가닿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냐고 말을 건넨다.

결국 축구선수를 꿈꾸는 소녀가 일으킨 제스네 가족의 분란과 소요는 어느 누구도 결정적으로 손해 보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 '윈윈 게임'으로 종료된다. 그 자신 뛰어난 폴로 선수였으나 인종차별의 장벽 앞에 좌절하고 말았던 아버지에게 딸이 받게 될 상처는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외부 장벽으로 인한 상처보다 꿈을 포기하는 데 따른 좌절감이 더 컸음을 기억하는 아버지는 결국 딸의 응원군이 된다. 늘 스포츠브라만 고르는 딸에게 뽕브라를 권했던 줄스의 엄마 또한 "너를 잃어버리느니 내가 축구 팬이 되기로 했다"며 마요네즈병과 소스통을 가지고 오프사이드 규칙을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요란스럽고 화려하고 시끄럽지만 더없이 넉넉하고 즐거워 보이는 인도의 전통 결혼식 풍경을 절정부에 배치한 '슈팅 라이크 베컴'은 너무도 뻔한 이야기를 전혀 뻔하지 않은 화술로 전한다. 가장 어렵고 힘들 때 무엇보다 큰 힘이 되는 게 가족이라는 것을, 길을 가로막은 장벽이 높고 험할수록 더욱 가족과의 대화와 소통은 절실하고, 그 장벽을 휘어 돌아갈 수 있는 지혜와 자신감 또한 가족으로부터 얻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은 족쇄이기보다는 보금자리가 맞다. 그 덕분에 어린 새는 저 넓은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박인영 / 영화칼럼니스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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