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에 천둥치는 소릴 듣고
잠에서 깨어 창밖을 본다
검은 바다와 흰 바람이 불빛에 일렁인다
저기 어디쯤
그리워했던 것들 모두 사라지고
버려야 할 것들만 어스름에 선명해진다
어떻게 흘러 여기까지 왔나

새벽공기가 신선하게 침엽수를 흔들고
새들이 지난밤의 기억을 물어다 풀숲에 심으면
강에선 물고기들이 그 씨앗을 훔쳐 달아난다
내가 선 곳이 이렇게 아플 줄이야
아침이 터올 때까지 창에 서서
꿈을 벗어 걸어놓고 밖을 본다
거기, 누구지?

- 정한용 시집 '흰꽃' 중 (문학동네, 2006년)

우리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 혼자 있을 때가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 창 밖의 검은 바다 위로 바람이 불고 그 위로 불빛이 일렁이는 걸 바라보다가 비로소 자신의 모습과 조용히 대면하게 되는 시간이 있습니다.

일렁이는 파도와 밀려오고 밀려간 시간 위로 '그리워했던 것들 모두 사라지고'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난 날 내가 그리워했던 것들은 사라지고 '버려야 할 것들만 어스름에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정작 내가 간절하게 소망했던 것들은 내게 없고 버려야 할 것들만 붙들고 있는 지금의 나. '어떻게 흘러 여기까지 왔나' 그 생각을 합니다.

지난밤의 기억을 누군가 감추어 주었으면 싶고, 그 기억의 씨앗을 훔쳐 달아난 이 있을 것만 같은 신 새벽. '내가 선 곳이 이렇게 아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괴로워합니다. 나는 지금 꿈의 옷을 입고 있지 않습니다. 그 옷을 벗어 걸어놓고 밖을 봅니다. 어두운 창에 어린 내 모습을 보다가 "거기, 누구지?"하고 묻습니다.

창에 비친 내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지요. 내가 꿈꾸던 내 모습이 아닌 얼굴로 살아가는 내가 거기 있습니다.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생각하면서 가슴 저린 새벽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런 새벽은 소중합니다. 본래의 나를 만나고 싶어지는 시간. 참나(眞我)를 찾고 싶어지는 이런 순간이 우리에게는 더없이 소중합니다. 천둥치는 소리와 함께 찾아와 그 소리로 나를 깨운다면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 낯설기만 한 내 얼굴을 바라보며 "누구지?"하고 물어야 합니다.

▶정한용 약력

1957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었으며, 1985년 '시운동' 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얼굴 없는 사람과의 약속' , '슬픈 산타페' , '나나이야기' 등이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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