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밤길
수풀 헤치며 듣던
어질머리 풀냄새 벌레소리
발목에 와 서걱이던 이슬방울 그리워요
우리는 두 마리 철없는 노루새끼처럼
몸 달아, 하아 몸은 달아
비에 씻긴 산길만 헤저어 다니고요
단숨만 들여마시고요
안 그런 척 팔만 한번씩 닿아보고요
안 그런 척 몸 가까이 냄새만 설핏 맡아보고요
캄캄 어둠 속에 올려 묶은 머리채 아래로
그대 목덜미 맨살은 투명하게 빛낯어요
생채기투성이 내 손도 아름다웠지요

고개 넘고 넘어
그대네 동네 뒷산길
애가 타 기다리던 그대 오빠는 눈 부라렸지만
우리는 숫기 없이 꿈 덜 깬 두 산짐승
손도 한번 못 잡아본걸요
되짚어오는 길엔
고래고래 소리질러 노래만 불렀던걸요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년)

이게 사랑이지요. 이렇게 철없는 두 마리 노루새끼 같을 때의 감정이 진짜 사랑이지요. 밤은 깊은데 비에 씻긴 여름 산길을 무서운 줄도 모르고 헤저어 다니면서 몸은 달아오르지만 표현은 제대로 할 줄 몰라 그저 단숨만 들여마시지만 이렇게 주체하기 힘든 이 마음이 사랑이지요.

그 밤길에 손도 한번 못 잡아 보면서 "안 그런 척 팔만 한번씩 닿아보고요 / 안 그런 척 몸 가까이 냄새만 설핏 맡아보고요" 그러고는 숫기가 없어 그저 수풀을 헤치며 다니기만 하던 그런 시간이 가장 순수한 사랑의 시간이지요.

사랑에 빠지지 않으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어떻게 "올려 묶은 머리채 아래로 / 그대 목덜미 맨살"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는 게 보이겠어요. 꿈 덜 깬 산짐승처럼 수풀을 헤치고 다니다 손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사랑하고 있는 동안은 생채기도 아름다움이지요. 사랑하고 있는 시간에는 상처도 아름다움이지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들이 노래가 되어 터져 나오는 그게 바로 사랑이지요. 아니 노래가 아니라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가 되는 게 사랑이지요.

그때 그 풀냄새 그립습니다. 그때 듣던 벌레소리 그립습니다. 그 밤 발목에 와 서걱이던 이슬방울 그립습니다. 그런 설렘이 사는 동안 우리에게 몇 번이나 찾아올까요. 그렇게 순수한 열정으로 누군가에게 빠지는 시간이 우리에게 언제 다시 찾아올까요.

김사인 약력

1955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학과에서 공부했다. 시집으로 『밤에 쓰는 편지』,『가만히 좋아하는』이 있으며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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