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博 김영관 학예관, 논문서 주장

고구려의 청주진출 시기는 기존에 알려진 5세기 후반이 아닌, 6세기 초반이라는 설이 새롭게 대두됐다.

이같은 주장이 맞다면 청주를 둘러 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쟁탈사는 다시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 6세기 금강상류 지역의 삼국 세력 분포도를 표현한 그림으로, 백제는 여기서도 위협을 느끼자 수도를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천도하게 된다. 서울역사박물관 김영관 학예연구관은 얼마전 '고구려의 청주지역 진출 시기' 논문을 발표했다.논문에 따르면 현재 중부지역의 고구려계 관방유적으로는 청원 부강 남성골 산성, 진천 대모산성, 대전 월평리산성 등이 존재하고 있다.이중 부강 남성골산성에서는 고구려계 유구, 유물인 구들, 아궁이, 장동호(배 부분이 긴 항아리), 시루 등이 출토, 고구려가 이 산성을 직접 경영했음을 뚜렷히 보여주고 있다.이밖에 진천 회죽리, 청원 상봉리, 남성골산성 등에서 고구려계 귀걸이가 출토, 고구려가 청주를 포함한 금강상류 지역을 지배했음을 보여주고 있다.이와 관련, 기존 역사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청주진출 시기를 '서기 475년(개로왕 21년) 이후'로 봐왔고, 이는 정설의 위치를 차지했었다.서기 475년은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수도인 한성을 공격, 백제 개로왕을 참살한 시기다. 사가들인 고구려가 이 직후 여세를 몰아 금강상류인 청주까지 진출한 것으로 봐왔다.그러나 김 학예연구관은 이번 논문을 통해 고구려의 청주지역 진출 시기를 이보다 50여년 늦은 '서기 529년 이후'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서기 529년은 고구려 안장왕과 백제 성왕 군사가 '오곡'(五谷·지금의 황해도 서흥)에서 전투를 벌여, 백제 군사가 크게 패퇴한 시기다. 김 학예연구관은 논문에서 이 시기 이후를 고구려의 청주진출 시기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논리가 성립되려면 백제가 개로왕 참살 이후에도 일정기간 한강유역을 지배했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돼야 한다.그는 이 부분에 대한 근거를 제시, ▶개로왕 참살직후 백제 문주왕이 신라에 구원을 요청, 신라군 1만명을 이끌고 한성으로 돌아온 점 ▶백제 동성왕이 483년 봄 한산성으로 사냥을 나가 군인과 백성을 위무한 점 ▶무령왕이 523년 한성을 순행하고 돌아왔다는 내용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점 등을 언급했다. ▲ 지난해 2차 발굴된 부강 남성골산성.
이밖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494년 고구려군이 괴산 청천(薩水)까지 진출,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나오는 점 등을 들었다. 기존 학설대로 고구려군이 서기 475년 이후 청주에 진출했다면 이같은 논리는 잘 성립되지 않는 부분이다.

김 학예연구관은 "역사적 기록으로 보면 고구려가 서기 475년 백제수도 한성을 함락시킨 것은 맞다"며 "그러나 고구려는 한성을 함락시킨 후 한강유역을 지속적으로 지배하지 않고 곧바로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와함께 "이후 고구려는 서기 529년 한성을 재차 침공, 그 여세를 몰아 백제군을 금강상류(청주지역)까지 뒤쫓아 온 것으로 보인다"며 "이후 고구려는 나제 연합군의 공격으로 한성을 다시 빼앗기는 시기인 서기 551년까지 청주지역을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의 주장이 맞다면 고구려가 청주지역을 지배한 시기는 기존 '75년'보다 학설보다 훨씬 짧은 '28'년(529~551년) 밖에 안되고 있다.

고구려 남진 최전방 본거지

# 남성골산성은

학계에서는 부강 남성골산성을 고구려의 남진 최전방 본거지로 보고 있다. 학자들은 그 근거로 ▶석성(石城)이 아닌 목책성(木柵城)이고 ▶성 곳곳에 불탄 흔적이 남아 있는 점 등을 들고 있다. 목책성은 성벽을 나무와 흙을 이용해 쌓은 성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고구려는 석성을 축조했다. 따라서 남성골산성이 목책으로 쌓아진 것은 당시 고구려가 오래 주둔하지 않았고, 또 정주(定住)가 아닌 최전방 임시 주둔지로 여겼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강 남성골산성은 김영관 학예연구관의 최근 주장을 상당부분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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