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혼자서 부르며 왔던 어떤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만을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서늘한 열망의 가슴이 바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속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거기 이 세상을 한꺼번에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과도 같았을, 그런 일순과의 마주침이라면,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손가락 빗질인 양 쓸어 올려보다가, 목을 꺾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사코 진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구름에라도 실려오는 실낱같은 향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랑이다. 갈 수 없어도 사랑이다. 魂이라도 그쪽으로 머릴 두려는 그 아픔이 사랑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시집 『구석』(실천문학사, 2007년)

*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습니다. 눈앞에 보여야 사랑입니다. 가까이 있어야 사랑입니다. 함께 있고, 함께 노래 부르고, 쓸쓸하지 않아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다르게 말합니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라고 합니다.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라고 합니다. 혼자서 노래를 부르며 사랑이라고 합니다. 쓸쓸함과 서늘한 열망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시인은 지금 '뒤집어 말하기 방식'으로 말하고 있고, '소망적 사고'(Withfull Thinking)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하는 사랑, 쓸쓸하고 서늘한 사랑, 그것도 분명 사랑입니다. 길을 걸으며 노래를 부르는 동안, 그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닿기만을 바랐다면 분명 사랑입니다. 만날 수 없는 사랑, 그래서 마음 서늘하지만 그 안에 사랑하는 이를 향한 열망이 끓고 있으므로 이 역설적인 열망도 사랑입니다. 그럴 때는 바닷가를 지나다 파도만 일어도 사랑입니다. 일렁이는 물너울 한가운데도 눈길 머무는 곳 있고, 그렇게 한순간 마주치며 나를 붙잡는 것 있으면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한사코 진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구름에라도 실려오는 실낱같은 향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랑"입니다. 가까이 있어도 향기 없는 사랑이 있고 멀리 있어도 진한 냄새가 배어 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넋이라도 사랑하는 사람 쪽으로 머리를 두려고 한다면 어떻게 사랑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아픔 어찌 사랑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이번 시집을 통해 한결 깊어진 시인의 농익은 목소리에 푹 빠집니다. 이 시의 시적 역설은 역설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멀리 있어도 사랑입니다.


▶정윤천 약력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고, 1990년 《무등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흰 길이 떠올랐다』,『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등이 있다. 계간 《시와 사람》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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