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을 때는 산을 바라보고 나이가 들면 사막을 바라보라
더 이상 슬픈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과거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웃으면서 걸어가라
인생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오늘을 어머니를 땅에 묻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첫아기에게 첫젖을 물린 날이라고 생각하라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분노하지 말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침밥을 준비하라
어떤 이의 운명 앞에서는 신도 어안이 벙벙해질 때가 있다
내가 마시지 않으면 안되는 잔이 있으면 내가 마셔라
꽃의 향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듯
바람이 나와 함께 잠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 뿐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무엇을 이루려고 뛰어가지 마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지 말고 가끔 저녁에 술이나 한잔해라
산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을 내려와야 하고
사막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깊은 우물이 되어야 한다

- 정호승 시집 '포옹'(창비, 2007년) 중에서



* 살다보면 인생이 다 끝난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하기만 하면 눈물을 참을 수 없는 날이 있다. 어머니를 땅에 묻고 통곡하던 날이 있고,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분노하는 날이 있다. 하느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가혹한 운명을 주시느냐고 원망의 말이 쏟아져 나오는 날이 있다.

그럴 때 위로가 되는 시, 우리 마음을 다독이며 위안을 주는 시가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정호승 시인은 그런 우리 마음을 아주 잘 헤아리고 한 편의 좋은 시를 우리에게 건네준다. 시인은 "인생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분노하지 말고 /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침밥을 준비하라"고 말한다. 하필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없다. 세상일은 어떤 일이든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게 인생이다. 늘 그렇게 생각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절망의 날이 와도 절망의 다른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을 어머니를 땅에 묻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 첫아기에게 첫젖을 물린 날이라고 생각하라"는 말이 그것이다. 오늘 속에 오늘의 다른 얼굴이 있는 것이다.

"젊을 때는 산을 바라보고 나이가 들면 사막을 바라보라"고 한다. 젊을 때는 산을 바라보아야 하지만 "산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을 내려와야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산도 보고 산의 폐허인 사막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인생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 정호승 약력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73년 대한일보에 시가, 1982년 조선일보에 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징지용문학상 등을 받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