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

여섯 살 옥희(전영선)는 과부집이라 불리는 곳에 산다. 옥희가 태어나기 한 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로 된 어머니(최은희)와, 큰아버지댁에 사시는 할머니(한은진), 식모 성환댁(도금봉) 모두 과부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큰 외삼촌이 아버지 친구라는 '사랑 손님' 한선생(김진규)을 데리고 온다. 옥희는 그가 아버지처럼 느껴져서 살갑게 따른다. 사랑 손님이 삶은 계란을 좋아한다고 옥희가 말하자 엄마는 계란 장수에게 계란을 사서 매일 밥상에 올린다. 옥희가 거짓으로 아저씨가 주신 것이라며 꽃다발을 전했을 때 엄마는 피아노 위에 놓여있던 아버지의 사진을 치우고 꽃병을 올려놓은 뒤 피아노를 친다. 계란 장수(김희갑)와 성환댁은 몰래 사랑을 나누다 아이를 갖게 되자 결혼을 결심한다. 엄마의 큰 오빠를 통해 어머니의 재혼 이야기가 나오자 반대하던 시어머니가 어렵게 허락한다. 사랑 손님은 편지를 통해 연심을 전하지만 어머니는 이를 뿌리친다. 사랑 손님이 서울로 떠나는 날 옥희와 어머니는 뒷동산에 올라 멀리 떠나가는 기차를 내려다본다.

옥희의 어머니, 젊어서 청상과부가 됐던 시어머니의 며느리, 과부집을 지키고 있는 젊은 과수댁…. 자르르 윤기 흐르는 쪽찐 머리에 단아한 한복차림의 그녀는 그런 이름들로 불린다. 하지만 자분자분 말하고 조신하게 걷던 그녀가 사랑손님의 방에서 남자의 중절모를 쓰고 거울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전혀 딴 사람이다. 마릴린 몬로 뺨치게 요염한 자세와 눈빛의 그녀. 세상이 부르는 많은 이름 말고, 그녀에게만 주어졌던 단 하나의 이름 석 자가 새삼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주요섭의 1935년도 원작을 각색한 신상옥 감독의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에서 극중 여주인공은 미장원을 운영하는 친구의 입을 통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름이 불린다. '정숙'이라는 그녀의 낯선 이름은, 중절모를 쓰고 나르시시즘에 빠지던 그녀, 무아지경 속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그녀에게 잘 어울린다. 어머니, 며느리, 과수댁이라는 이름보다 훨씬 더.

한국영화의 '모던'했던 한 때, 1960년대의 영화(榮華)를 증명하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공간은 전근대성의 위용을 허물어뜨리며 퍼져가는 근대화의 물결로 일렁인다. 사이좋게 늘어선 기와집과 초가집들 사이로 교회와 유치원, 학교 건물이 들어섰지만, 여전히 우물가는 온 마을 소문들이 뒤엉키며 공동체의 규율을 관리하는 곳이다. 쪽머리에 한복 입은 아낙들이, 면사포와 웨딩드레스 차림의 신부를 홀린 듯이 구경하는 곳. 그 곳에서 근대화의 첨병처럼 방방곡곡에 세워졌던 교회의 가르침-"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를 되뇌며 '일부종사(一夫從事)'를 다짐하는 것이다.

가히 '혼돈의 동시성'이라고 불러 마땅할 이 풍경 속에서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여자의 내면은 감당하기 힘든 격류에 휘말린다. 스물 초반에 청상과부 된 딸을 걱정하는 친정어머니의 야단에도 불구하고 지난 6년 동안 흔들림 없이 피아노 위를 지키고 있었던 건 죽은 남편의 사진이었다. 하지만 사랑손님이 주었다는 꽃을 담은 꽃병이 그 자리를 차지했을 때, 마치 오래된 저주의 주문이 풀리듯 피아노 뚜껑이 열리고 쇼팽의 '야상곡'이 흐른다.

옥희가 태어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그 소리는, 한복과 쪽머리, 수절과부의 삶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그녀 내면의 욕망과 기호(嗜好)의 아우성으로 들린다. 봉인이 풀린 그 첫 소리는 오랜 겨울동안 두꺼운 얼음장 밑으로 흐르며 새 봄을 기약하던 계곡물처럼 맑고 영롱하기만 하다. 하지만 내달리고 싶은 욕망이 절절한 만큼 발목을 잡아채는 강한 힘에 움찔거릴 때, 그 소리는 마치 천 길 낭떠러지를 굴러 떨어지는 폭포수의 굉음과도 같다.

결국 어머니는, 매일 같이 드나드는 계란 장수의 품에서 새 삶을 꿈꾸는 성환댁이 그러했고, "두 번 아니라 열두 번을 가서라도 팔자를 고쳐야한다"며 재혼하는 미장원 친구가 그러했던 것처럼 머리채를 싹둑 잘라내지 못한다. 세상이 호명하는 어머니/며느리의 우렁참이, 제 자신의 이름 석 자가 부르는 가냘픔을 간단히 압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들어버린 꽃다발과 꽃병을 치운 자리에 다시 남편의 사진이 되돌아온다.

그래서 그녀는 불쑥 솟아오른 배의 성환댁을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본다. '말도 않고 웃지도 않고 밥도 잘 안 먹고 한숨만 푹푹 쉬던' 그녀 앞에서 '일 잘하고 밥 잘 먹고 잠 잘 자던' 성환댁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집 대문을 들어선다. 벌건 대낮 치마를 뒤집어 입어가며 자신의 욕망의 부름에 충실했던 그녀가 우물가 뒷공론과의 투쟁에서 당당히 승리하고 귀환하는 것이다. '헌 사람들끼리 만나 새 살림 꾸리는' 재미를 옹골지게 누리면서.

그 밤, 격렬한 애모의 단어들이 가득한 남자의 편지를 받았을 때, 휩쓸려가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그녀가 필사적으로 들여다보고 쓰다듬던 건 남편의 사진들, 옷장 속 깊이 간직했던 옷가지들이었다. 부질없기에 더 위력을 발하는 그것들과, 과거의 추억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 그녀는 다시 피아노 뚜껑을 닫는다. 그렇게 남편의 사진으로 굳게 봉인된 어머니의 피아노는, 아마 그 뒤로 다시 열리지 않았으리라. / 박인영·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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