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지역, 원래는 영남학파 東人이 선점

② 옥천 창주서원

조선 선조 41년(1608년)에 건립된 창주서원은 현재 당시 건물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 다만 서원 건물터 자리에 묘정비(도기념물 105호)가 남아 있어, 과거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창주서원을 언급하지 않고는 조선시대 옥천지역 양반·지식사회를 논할 수 없다. 그 만큼 창주서원은 중요성을 지녔다. 당시 중앙정치를 대리한 동-서인의 대결이 옥천지역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다.

창주서원 묘정비를 찾아가는 길의 의외로 쉽지 않다. 옥천에서 영동·김천 방향 4번 국도를 따라가다 이원교를 지나 남쪽으로 난 길을 접어들면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온다. 이곳서 1㎞ 정도 달리면 이원면 현리마을에 도달하게 된다. 마을 안쪽에 창주서원 묘정비가 세워져 있다.

▲ 옥천 후율당 : 1588년 조헌이 낙향해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조헌은 이곳에서 임진왜란 의병진을 규합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 창주서원

창주서원은 표충사(表忠祠)에서 유래하였다. 표충사는 1608년(선조 41) 안내면 조헌의 묘소 앞에 세워져 이듬해 사액을 받았다.

이후 우암 송시열 등이 1657년(효종 8) 현위치에 표충사를 대신한 창주서원을 세웠고 1682년(숙종 8) 사액을 받았다. 1864년(고종 1) 서원이 훼철돼 현재는 터와 묘정비만 남아있다.

묘정비는 송시열이 글을 짓고, 김수증(金壽增)이 글을 썼다. 비는 높이 254cm로 장방형 비좌에 기와지붕 모양 개석을 올렸다.

■ 주향인물 조헌

조선 중기의 문신·유학자·의병장으로 본관은 배천(白川), 호는 중봉·도원(陶原)·후율(後栗)이다. 1565년 성균관에 입학,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처음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내외 관직을 역임하면서 강경한 입장을 보여 유배를 가기도 하였다.

1582년 계모 봉양을 위해 보은현감에 자청하였으나 1584년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이후 옥천 밤티(栗峙)에 만거(오래 머뭄)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8월 1일 영규의 승군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 당하고 불과 700명의 병력으로 금산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했다.

■ 배향인물

창주서원에는 조헌을 비롯해 김집(金集),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곽은(郭垠) 등 5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1670년에 배향된 김집은 조헌의 묘소를 개장하고 사우를 옮기는데 큰 역할을 했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서원을 옮겨 세우고 사액을 받는데 큰 역할을 했고 각각 1682년과 1694년 추향됐다. 이밖에 1710년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한 곽은을 추향됐다. 곽은은 선산곽씨로 송시열의 외가쪽 인물이다.

■ 조헌관련 유적

조헌은 송시열과 함께 호서 사림을 대표하는 인물로, 충북 곳곳에 그 와 관련된 유적이 산재하고 있다.

옥천에는 창주서원터, 묘소(도기념물 14호· 안남면 도농리), 신도비(도유형문화재 183호), 후율당(도기념물 13호·안내면 도이리), 이지당(도유형문화재 42호·군북면 이백리) 등이 있다.

보은 상현서원과 후율사(도기념물 15호·수한면 차정리), 청주 신항서원(도기념물 42호)에 그의 위패가 배향돼 있다. 최근 선생 묘소 앞에 표충사가 새로이 건립됐다.

■ 관람 포인트

1. 조헌이 옥천에 만거한 이유는.

조헌은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했다. 따라서 그가 옥천에 만거한 것에 대해 학계는 줄곧 궁금증을 표해 왔다. 이에 대해서는 외가 관련설이 매우 유력하게 부각돼 있다.

조헌은 1582년 보은현감을 자청, 현지에 부임하게 된다. 조헌이 10세 때 모친당을 당하자 그의 부친 조응지는 강릉김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된다. 바로 강릉김씨 고향이 보은이었다.

조헌은 강릉김씨 계모에게도 효를 다하여 봉양했고, 이것이 연유가 돼 이웃에 위치하고 있는 옥천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옥천은 그가 열렬히 지지했던 송시열의 고향이기도 하다. 시장(諡狀)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율곡이 세상을 뜨자 당의(黨議)는 더욱 격렬해지고 조정 내부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에 선생(조헌 지칭)은 서울 근처에 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옥천 안읍현(安邑縣) 마을로 내려가 우거하였다. 이곳에서 자연 풍경을 친애하여 날마다 그곳을 거닐기도 하고 함께 어울리는 선비들과 강론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밭에 나가 하인들에게 농사일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2. 중앙정치 에서도 비슷한 현상.

옥천에는 창주서원만 존재하지 않았다. 창주서원이 들어서기 30여년 전에 이미 동인(영남학파) 계열의 쌍봉(雙峰) 서원이 존재했다.

이후 쌍봉서원이 임란으로 소실되자 같은 동인계열의 삼계(三溪) 서원과 삼양(三陽) 서원이 쌍봉서원의 맥을 이었다. 두 서원은 배향 인물이 전팽령, 곽시 등으로 같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옥천지역은 원래 지리적 관계로 영남학파가 지배하던 곳이었다. 이에 대해 서인계열이 창주서원을 세운 후 동인을 공격하면서 옥천지역에서는 치열한 '향권'(鄕權) 다툼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향권 다툼이 아닌, 서인-노론계와 동인-남인계의 중앙정치 대리전 양상을 띄었다.

그 결과, 조헌, 송시열의 서인-노론계가 승리하면서 동인-남인계열 서원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중앙정치 무대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전개돼 이 시점을 전후로 동인-남인계열은 완전 몰락했다.

도움말: 옥천군청, 옥천문화원, 보은군청,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사

■ 용어설명

표충(表忠): 고유명사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문자대로 해석하면 '충성심을 드날렸다' 정도가 된다. 국가주의를 내세운 일종의 이데올로기 조작으로 볼 수 있다. '현충'(顯忠)과 거의 같은 뜻으로, 전장에서 죽은 이에게만 주어지는 표현이다.

동인-서인: 재야의 사림은 선조대에 이르러 훈구파를 물리치고 드디어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사림은 얼마안가 학문과 정치노선 차이에 인해 영남학파의 동인과 기호학파의 서인으로 나눠졌다. 동인은 영남학파인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인 건청동에, 서인은 기호학파인 심의겸의 집이 도성 서쪽인 정동에 위치한데서 이름지어졌다.

노론-소론: 서인에서 분화된 세력으로 척신 김익훈의 처벌을 둘러싸고 의견 대립을 보이게 된다. 젊은 선비들은 처벌을 주장했으나 송시열은 오히려 김익훈을 옹호했다. 이후 장희빈 처리를 둘러싸고 완전 결별하게 된다. 송시열 등 노론은 장희빈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경종)의 입장을 고려해서 그녀를 살려줘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노론이 승리하여 장희빈은 사약을 받았고 소론의 세력도 크게 위축됐다.

■ 서원에서의 공부 방법

조선시대 서원의 교육은 주로 '강'(講)을 통해 이뤄졌다. 강은 배운 글을 소리높혀 읽고 그 글의 뜻을 묻고 답하는 전통적인 교수법이다. 이 강은 열리는 시기에 따라 '순강(旬講)', '망강(望講)', '월강(月講)'으로 구분됐다. 순강은 10일, 망강은 15일, 월강은 1개월마다 열리는 것을 말한다.

강은 또 그 방법에 따라 배강(背講)과 면강(面講)으로 구분됐다. 배강은 암송낭독이고 면강은 책을 펴놓고 낭독하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 조선시대 서원들은 계절에 따라 교과 내용을 달리 편성했다.

겨울과 봄에는 사서오경을, 여름과 가을에는 제사자집을 읽게 했다. 이중 제사자집이 비교적 쉬운 편이다. 더운 계절에는 공부가 잘 안되기 때문에 선조들은 이를 고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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