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정유감>

박천호 / 시인, 교사

영월 남면 광천리에 소재하고 있는 청령포는 영월읍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되어 17세에 죽음을 맞은 단종(端宗)이 머물던 곳이다. 청령포는 남한강의 상류인 서강(西江)의 한복판에 마치 섬처럼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데다, 남쪽은 절벽과 산으로 막혀있어 천혜의 유배지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오늘은 觀音松에 내린
촘촘한 햇살자락 걷어내어
냇가 자갈밭에 말려야겠다.

내일은 西江 감아 도는
시퍼런 물줄기 잘라내어
버드나무 가지 엮어야겠다.

御所에 달빛 흐르면
살 에이는 설움 모아
두견이 울음 적셔야겠다.

산자락 낮게 스민 새벽
베갯머리 파고든 찬 바람에
간밤 꿈자리 여전히 뒤숭숭한데

모레는 무엇을 하나
그 다음날엔 또 무엇을 하나
내 숨결 그 날까지 붙어있을까?
- 拙詩 <청령포에서> 전문 -

요즘도 배를 타고 청령포를 건너가면 단종(端宗)이 머물던 초라한 어소(御所)와 발길을 제한했던 금표비(禁標碑) 등이 남아 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더욱이 단종(端宗)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들었을 것이라 해서 이름 지어진 관음송(觀音松)은 육백년 세월의 무상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청정한 모습으로 서있다. 또 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단종(端宗)이 아침저녁으로 올라 서울을 바라보았다던 노산대(魯山臺)가 서강(西江)을 굽어보고 있다. 단종(端宗)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이곳으로 유배되었는데 여름 홍수로 청령포가 침수되자 관풍헌(觀風軒)으로 처소를 옮긴 후, 그 해 시월에 열일곱의 젊은 나이로 한 많던 이승을 떠났다.

조선시대에는 그 어떤 왕릉이라도 수도 한양을 기준으로 백리 안쪽에 자리 잡는 게 통례였다. 그러나 장릉(莊陵)은 단종(端宗)이 유배 중에 운명을 마쳤던 연유로 그 시대의 완고한 원칙에서 벗어나 한양에서 천리 밖에 떨어진 아주 외진 곳에 봉분했던 유일한 왕릉이다.

단종(端宗)이 죽자 역적의 시신에 손을 대면 삼족을 멸한다는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거두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영월 호장 엄흥도가 밤중에 동강에 버려진 시신을 몰래 거두어 그들의 선산인 동을지산(冬乙旨山)에 장사지냈는데, 그곳이 현재의 장릉(莊陵)이다.

요즘 북한에서 만들어진 <사육신>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평소 안방극장에서 자주 대하지 못했던 얼굴과 다소 귀에 생소한 억양의 대사가 있긴 하지만, 단종(端宗)을 향한 애틋한 마음의 표현은 남북 모두 여전한 것 같다.

청령포돌아 나오는데 관풍헌(觀風軒)에 걸린 단종(端宗)의 탄식소리 한 구절 맴돈다. <하늘은 귀머거리인가/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지/어쩌다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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