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여공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김선생(김진규)은 한 여공에게 연애편지를 받자 공장 측에 이야기한다. 그 여공은 짐을 싸서 고향으로 떠나고 그는 생계를 위해 피아노 교습을 시작한다. 지난 10년간 쉼 없이 재봉틀을 돌려온 덕분에 양옥 2층집을 장만해서 이사한 뒤 쥐 때문에 놀란 아내(주증녀)는 하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김선생을 짝사랑하는 여공 조경희(엄앵란)가 공장서 한 여자(이은심)를 하녀로 데리고 온다. 맨 손으로 쥐를 잡는 기이한 분위기의 하녀는 아내가 친정에 다니러 가자 그와 동침을 하고 아이를 갖는다. 아내의 말을 따라 계단에서 굴러 아이를 낙태한 하녀는 그의 아내가 아들을 낳자 복수심에 창순(안성기)을 계단에서 떨어져 죽게 만든다. 세상에 알려지기를 두려워하는 아내는 하녀의 뜻에 따라 남편을 2층에 올려 보내고 하녀의 식사를 준비한다. 하녀의 집착에 괴로워하던 그는 함께 쥐약을 먹지만 1층으로 내려와 아내 옆에서 죽는다. 화면이 바뀌면 그가 아내와 신문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하녀에게 유혹당하는 남자들의 약점을 갖고 있는 것 아니냐고 물으며 그가 웃는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모든 것

지난 10년 동안 재봉틀 돌려 장만한 그들 부부의 새 집은 2층 베란다만 드러날 뿐 1층이 잘 보이지 않는다. 충성스런 중무장 대열처럼 집을 에워싼 시멘트 담장과 뾰족 창살이 그들의 가정을 바깥세상으로부터 차단시킨 것이다. 대문조차 잘 보이지 않아 더욱 완벽해 보이는 '격리'가 주는 안온함 속에서 그들 가족은 '스위트 홈'이란 파랑새를 막 손에 쥐려는 흥분에 전율한다.

1960년을 한국영화사의 기억할 만한 순간으로 만든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서 이들 가족은 침대와 피아노, 텔레비전까지 있는 "동네에서 젤 부잣집"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젤 행복"해지는 꿈을 꾼다. 단칸방에서 2층 양옥집으로 상승하고, 텔레비전을 들여놓고,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는 꿈. 차근차근 계단을 밟고 올라가듯 얻어낼 그 모든 행복을 오래도록, 영원히 내 것으로만 갖고 싶은 꿈은 너무나 절실하고 달콤해서 "한 방(房)도 남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들의 꿈은, 하녀로 들어갈 '담배 피는 처녀'에게 조경희가 손짓으로 보여준 것 같은 제트기의 궤적을 따른다. 하늘로 솟구쳤다가 바닥으로 처박히는, 연료 바닥난 제트기처럼 추락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불행한 죽음이 잇따르는 공간은 계단이 된다. 부부와 1남1녀가 핵가족의 단란한 풍경을 연출하는 1층과, 비록 얄팍한 것일망정 중산층 대열에 끼어들고자 애쓰는 여공과 하녀의 공간인 2층을 나누는 계단은 중산층의 허위의식과 비루한 성적 욕망이 뒤엉키면서 처참한 죽음의 연쇄를 부르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담장을 둘러친다 해도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이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는 공포를 담은 영화 '하녀'에서 두려움의 가시적 대상은 여공과 하녀라는 이름의 사회적 타자들이다. 단호한 윤리의식의 틈을 노리는 여공들은 죽음조차 연민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존재이며, 부부의 침실을 무시로 열고 들어오는 하녀는 '미친 사람'으로 아이들에게마저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강박적으로 진행됐던 국가 근대화와 도시화의 과정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를 강요받았던 사회 주변부 여성계층의 위협은 전도(轉倒)된 과장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들 또한 끊임없이 쳇바퀴를 돌려야하는 다람쥐의 운명에 수렴된다. 넓은 산천을 뛰어다니다 잡혀온 다람쥐가 다리가 굳어 도망 못 갈까봐 계속 바퀴를 굴려야하는 것처럼 모두들 다람쥐 신세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고단한 노동 끝에 번듯한 2층집을 마련했던 아내는 이번에는 "집안을 깨끗이, 재미나게 꾸밀 의무"로 텔레비전을 들여놓기 위해 재봉틀을 돌린다. 가족들과의 시간은 아마 아이들 대학 등록금을 벌어야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또 기약 없이 미루어질 것이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 남편의 배신에 대한 분노와 자식의 죽음에 대한 슬픔도 억누르고, 독살 시도를 은폐해야했던 그녀는 "애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 살기 위해" 또 재봉틀을 하염없이 돌린다.

"내 식구를 굶겨죽일 순 없다"는 책임감으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여공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생계대책을 걱정하던 남자가 굴리던 욕망의 쳇바퀴는 끝내 죽음을 부른다. 비루한 성적 욕망의 끝을 알지 못하고 이끌리던 그는 아내의 구원을 고대하고 처분을 기다리다 무기력하게 하녀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오른다. 어머니가 있는 침실 대신 계단을 오르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어디 가?" 딸이 묻고, "아버진 오늘부터 내 방에서 자" 하녀가 답하는 장면은 중산층의 '스위트 홈' 신화가 박살나는 순간의 파열음을 최대치로 증폭시키는 것이다.

그의 아내가 꾸었던 악몽처럼, 쥐약 먹은 이들의 죽음으로 대단원의 파국을 맞는 것처럼 보이던 영화는 결국 남자의 환상이었다며 안전한 퇴로로 내뺀다. 서슬 퍼렇던 검열과 시장(市場)의 엄포에 복종한 듯 보이는 이 고육지책은, 그러나 계단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내려오던 하녀의 널브러진 주검이 주던 경악과 충격을 효과적으로 제거하지는 못한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꿈과 현실을 가르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아니라고 고개 흔드는' 누구도 쉽게 말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박인영 / 영화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