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계획' 탄로나자 월유봉으로 피신

③ 영동 한천서원

▲ 한천정사 사액으로, 운필이 매우 힘차 보인다. 과거 고문헌을 보면 충북 최남단 영동지역에는 조선시대 때 초강서원, 송계서원, 화엄서원, 한천서원 등 4개의 서원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중 현존하는 서원 건물은 없다. 다만 한천서원이 한천정사로 이름이 바뀌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한천서원 자리에는 송우암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한천정사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황간면에서 서북방 쪽으로 579번 지방도를 따라 2Km 정도를 달리다 보면 한천팔경 하나인 월유봉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우암이 한때 은거하면 학문을 연구하던 한천서원이 세워졌던 곳이다. ■한천서원1717년(숙종 43) 박수묵 등의 건의로 건립되었다. 1726년(영조 2)에는 민진원, 심택현 등의 요청으로 사액을 받았다. 현재 건물은 존재하지 않고 그 자리에 한천정사와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 현재 한천서원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 자리에 우암유허비가 건립돼 있다.
■독향인물 송시열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왕을 모셨고, 1649년 당파싸움에 휘말리자 낙향,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이후 다시 중용돼 1671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을 역임한 것을 끝으로 화양계곡에 은거했다. 이후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제주로 유배됐고, 다시 서울로 이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건물구조

고종 5년(1868)에 서원이 철거되자 그 후학들이 유림회를 결성, 1910년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새롭게 건립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방을 들였고 전면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가구형식은 3량가(三樑架)에 주위로 막돌담장을 둘렀다. 1999년 충북도문화재자료 제 28호로 지정돼고, 현재 은진송씨 종중이 관리하고 있다.

■관람 포인트

1. 우암, 왜 한때 영동에 기거했나.

우암은 옥천(창주서원 참고)에서 태어났고, 말년의 대부분을 괴산 화양구곡에서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천서원이 그를 독향(1개의 위패만을 모심) 하고 있는 점은 매우 이채롭다.

우암은 명나라가 멸망하자 야만국(?) 청나라를 받들 수 없다며 '소중화'를 주창했다. 이때의 소중화는 사라진 명나라 대신 조선이 세계의 작은 중심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암의 소중화 사상은 효종의 지지를 등에 업고 청나라 정벌 계획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북벌계획은 중도에 탄로나면서 고문을 받을 처지에 놓였다. 물론 이것이 빌미가 돼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다급해진 우암은 영동황간 월유봉 일대로 피신했다. 우암의 나이 43세 때였고, 그는 이곳에서 여러 해 은둔하며 유생들을 가리켰다. 일설에는 아침마다 월류봉 중턱의 샘까지 오르내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한천정사 출입문으로 담쟁이덩쿨이 고풍스런 모습을 더하고 있다. 2. 왜 독향으로 모셔져 있나.현존하는 한천서원 봉안제문과 황간유생 상량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곳은 (선생이) 수년간 은거하며 즐기던 곳으로 그의 족적이 남아 있다. (…) 오랫동안 尊享之院을 세우지 못하다가 多士가 개탄하여 비로소 신궁을 세웠다'(봉안제문)'黃江大老가 賢弟로서 주선하고 蓮洞의 相公은 기초를 든든히 하였으며 方伯과 守令들도 정성을 다하였다'.(상량문) 위 글을 보면 한천서원이 단순이 향인들에 세워진 것이 아닌, 황강대로, 상공, 관찰사(방백), 수령등의 도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때의 황강은 권상하의 고향인 제천 한수면 황강리를 뜻한다. 현재 이곳에는 그를 모신 황강서원이 세워져 있다. 상공은 재상의 또 다른 별칭으로, 당시(숙종조) 조정은 서인 노론계가 장악하고 있었다.바로 한천서원은 당시 서인-노론계가 우암의 은둔과 강학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중앙 실력자가 독력을 하고 또 소재지 관찰사와 수령이 공사 협조를 한 서원이다. 이 때문에 한천서원은 병향, 배향, 추향없이 우암만을 독향하고 있다.3. 왜 우암에 열광했을까사림(士林)은 조선 중기 사화(士禍)를 겪으며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4차례에 걸친 사화가 있었으나 소멸하지 않고 지방인재를 계속 배출했다. 특히 인조반정(1623년) 이후 사림 출신이 특채되면서 지방 강학처로 더욱 주목을 받았다.따라서 서원은 넓게는 중앙 정치와 연결된 인적·학문적인 연결 통로였고, 좁게는 중앙 정치를 배경으로 지역 향권을 장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런 정치환경 속에서 당시 '서원정치'의 총수 역할을 한 사람이 서인 노론계 수장인 우암이었다. 당시 영동지역 문인들이 우암에 열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문중 성격으로 출발한 서원을 노론계 서원으로 바꾸면서 정치적 유리함을 얻고자 했다. 이는 중앙의 정치환경이 지방에 그대로 나타난 투영된 것이기도 했다.4. 영동지역 나머지 서원은 ▲ 한천서원 자리에 세워진 한천정사 모습으로, 1910년 새롭게 건립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한천서원 이전에 영동지역에는 초강서원(광해군 3년·1611), 송계서원(현종 5년·1664), 화엄서원(현종 11년·1670)이 각각 세워졌다.

초강(草江) 서원은 초기에 김자수, 박연, 박사종을 주향내지 병향했다. 이밖에 송계서원은 조위, 박영, 김시창, 박응훈 등을, 화엄서원은 장항, 장필무, 박인 등을 역시 주향내지 병향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면 은진송씨, 밀양박씨, 구례장씨 문중 인물이 대거 추향내지 재추향됐다. 송방유(의병출신), 송시영(우암 동생·이상 초강서원), 박유동(송계서원), 박흥생, 장지현(이상 화엄서원) 등의 위패가 이때 모셔졌다. 호서사림의 거유인 송시열은 송계와 화엄서원에 봉안문을 썼다.

바로 영동지역 서원들은 문중서원+노론계 서원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문중서원 성격으로 출발했으나 노론계가 보은, 옥천에 이어 영동까지 그 세력을 넓히면서 우암의 입김이 곳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과정에서 위패의 서열을 따지는 위차문제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도움말: 영동군청, 영동문화원,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사

■서원은 풍수를 의식했을까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한 국가였다. 따라서 풍수사상을 멀리 했을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의 서원은 풍수의 기본이론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세를 택하고 있다. 산을 뒤로 하고 전방으로는 물길을 취했다.

일부 서원은 '야세'(野勢)라고 해서, 물길 대신 들을 취했다. 이 경우 '배산임야'(背山臨野)라는 말이 사용됐다.

이밖에 조선의 서원 대부분은 전저후고(前低後高) 지세를 취했다. 앞은 낮고 뒤가 높다는 뜻으로, 배산임수 지형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런 모습이 나오게 된다.

주목할 부분은 서원의 2개 구성 요소인 제사 공간과 공부하는 공간을 전저후고 중 어떻게 배치했나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원은 '전학후제'(前學後祭)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학동들이 공부하는 강당(講堂)은 서원공간 전면부에 배치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堂)은 후면부에 배치했다. 이는 공간의 위계를 충분히 고려한 결과로, 제사공간에 위엄의식을 부여했음을 알 수 있다.

강당은 학동들이 공부하는 곳이기 때문에 온돌과 마루가 깔렸다. 그들이 숙식하고 독서를 했던 재사(齋舍)에도 온돌과 마루가 깔렸다. 그러나 사당은 제향의식만을 위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온돌은 없고 마루나 회반죽 바닥으로 처리했다.

▲ 월류봉은 한천팔경의 제 1경에 속한다. 얼마전 정자가 건립돼 운치를 더하고 있다.


■용어 해설

정사(精舍): 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마련한 집으로 정신 수양의 의미가 강하다. 때문에 서원과 달리 건물도 매우 단촐한 편이다. 그러나 정사라는 표현을 먼저 사용한 곳은 절이다.

한천팔경: 한천서원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달도 쉬어 갈 정도로 경치가 아름답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한다. 1경 월류봉, 2경 화헌악, 3경 용언동, 4경 산양벽, 5경 청학굴, 6경 법존암, 7경 사군봉, 8경 냉천정 등이다. 한천정사 주련(기둥)에는 다른 곳과 달리 8경을 이름을 적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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