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정유감>

김은숙 / 시인

따뜻한 눈길과 풍성한 덕담이 넘치는 가운데 민족의 명절 한가위가 지나갔다. 마음 넉넉하고 훈훈한 날이 되라는 인사를 참 잘 하는 나지만, 돌이켜보면 보름달처럼 둥근 마음으로 생활하는 날이 도대체 몇 날인지 모르겠다. 마음이 넉넉한 것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그것을 알면서도 순간에 소용돌이치며 작은 일에 온 신경을 쓰고 때로 참 각박해지는 마음기둥들. 이런 때는 고개를 들어 멀리 산과 들을 바라보면 마음은 저절로 차분히 정돈되고 둥들어진다.

풍요로움의 정점 한가위를 넘어섰으니 이제는 산과 들의 풍광도 크게 변모하리라.

10월은 바야흐로 단풍의 계절. 온 산하는 아름답게 물들어갈 것이니, 차츰 몸을 비워가는 들판의 허허로움과는 달리 산빛 물빛은 더 곱게 물들어가며 사람들을 깊숙이 잡아당길 것이다.

한여름의 촘촘한 엽록(葉綠)의 시간을 지나서, 진 초록빛 푸른 물을 바닥까지 쏟아낸 후 하루하루 곱게 물들어갈 잎새들, 그 아름다운 소멸을 바라보며 사람들 눈은 더 깊어지리라. 저리 아름다운 소멸의 빛을 스스로 만들어내기까지 가파른 바람과 깊숙이 패인 화농의 상처며 아픔을 힘겹게 견딘 나날은 얼마나 될까.

우리의 소멸로 가는 길도 과연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한 생애 뜨겁게 태우고 눈부신 아름다움 속에 내는 장엄한 조락(凋落)의 길을 바라보는 사람들 눈은 누구나 겸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의 사랑은 늘 불온하였다
견뎌내거나 견뎌내지 못한 시간이
시월의 저녁 아래 낮게 엎드리고
갈참나무 매달린 저 작은 열매가
이 계절의 정수리에 아프도록 빛난다
굳어버린 생채기만 단단한 옹이로 키우며
어설픈 열매조차 맺지 못한 내 불온한 사랑은
저녁 갈참나무 숲에 와서 무릎을 꿇는다
그대여 나여 지나간 사랑이여
갈참나무 저 작은 도토리처럼
떫은 몸 스스로를 몇 번이고 씻어내며 지워
거친 밥상 따뜻하게 채우는 양식이 되거나
해거름 쓸쓸한 가지로 날아드는 새에게
푸근한 둥지 자리조차 내어주지 못한
척박한 묵정밭의 생애여
시월의 저녁 지금도
붉나무 잎새는 눈부시게 더욱 붉어지고
넉넉한 과즙의 사과 익어가며 수런거리는데
후줄근히 구겨진 내 사랑의 허물은
갈참나무 숲에 쌓인다

-拙詩 '갈참나무 숲으로 가자'


어설픈 열매조차 맺지 못한 스스로가 부끄러워 무릎을 꿇는 시월의 숲. 누군가의 속을 따뜻하게 채우는 한 그릇 밥이 되거나, 푸근한 둥지 자리조차 내어주지 못하고 한 생애가 그저 척박한 묵정밭인 스스로로 인해 가슴에 눈물 고이고, 후줄근히 구겨진 허물만 쌓여 마음 스산해지는 가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마음의 어깨를 결어 서로 조금씩이라도 훈훈해지는 가을이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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