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백제유물전시관 '吳著 특별전'
이와함께 "오저는 그러나 정3품의 사헌부 장령으로 있다가 관료 후배들의 모함을 받아 종6품의 '성환도 찰방'(지금의 천안 우체국장 정도)으로 발령받기도 한다"며 "이는 그가 약한 문벌을 지녔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사헌부 장령은 지금의 감사원 국장급에 해당하는 자리로, 당시 앞선 전례를 보면 이곳서 근무한 관료들 대부분은 판서 등 정2품(지금의 장관직)으로 승진하는 예가 많았다.
▲ 오저가 받은 성환도찰방 교지로, 성환도찰방은 지금의 천안 우체국장에 해당한다. 오저가 정3품에서 종6품으로 떨어진 시기로, 좌천 폭이 가장 컸다. | ||
강 학예사는 이같은 원인의 주된 이유로 오저의 가문이 당시로서는 권력 마이너리티인 '소북인'에 속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따라서 오저의 가문은 당시 집권계열인 '노론계'가 아닌, 동류 집단인 소북계와 결혼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분석은 오저의 교지를 맥락적으로 살펴 본 것으로, 그의 좌절 많고 복잡했던 심리는 평생동지였던 표암 강세황의 사문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오저와 강세황은 동갑이자 먼 친척일 뿐 아니라 청원 낭성(오저)와 대전 회덕(강세황)에 거주하는 등 거리적으로도 매우 가까웠다. 강세황은 오저가 매번의 인사 때마다 좌절을 겪자 그가 올렸던 사직글(상소문) 뒷면에 그를 위로하는 글을 여러편 남겼다. 이중 1편을 번역문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시문중 작은 글씨 부분)
'장헌(장령)이었던 친척 吳士晦(士晦는 오저의 字)가 내가 사는 성남의 집에 머물러 있은지 5달… 벼슬을 내놓고 서원(청주 지칭)의 옛 집으로 돌아갈 적에 서로 같이 있으면서 갑자기 작별을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막연하게 하였다(…) 표옹 쓰다'.
'표옹'은 강세황의 또 다른 지칭으로, 오저가 좌천에 따른 실의 끝에 벼슬을 내놓자 이를 위로하기 위해 쓴 싯귀로 보여지고 있다.
강 학예사는 "조선시대 한 선비의 과거 답안지, 교지, 간찰 등이 일대기적으로 존재하는 예는 전국적으로 거의 유일무이하다"며 "오저가 남긴 각종 고문헌은 문화재 지정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 조혁연
조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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