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백제유물전시관 '吳著 특별전'

청주백제유물전시관(학예사 강민식)이 18일부터 내년 2월 말까지 '고문서에 나타난 추봉 오저의 삶' 특별 기획전을 개최한다.

▲ 오저 초상화 오저(吳著·1713~1794)는 보성오씨 청주 입향조인 오숙동(吳淑仝)의 직계 후손으로, 조선 영·정조 시대를 살다간 인물이다.호가 추봉인 오저는 최고 벼슬이 지중추부사(정2품) 밖에 오르지 못하는 등 어찌보면 보통의 삶을 살다간 조선시대 관료이자 지식인이었다.그러나 이번에 전시되는 과거 답안지 6점, 교지 30여점, 간찰, 호적·호구자료, 강세황의 서화 등 50여점의 사료는 일목요연한 시대적 흐름을 지니고 있어, 개인사를 물론 조선시대 관료제도를 연구할 획기적인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30여점의 교지(일종의 관직 임명장)는 ▶문벌이 약할 경우 받는 불이익 ▶늙어서도 관직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던 증직제도 등 이제까지 잘 드러나지 않았던 조선시대 관료상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증직제도는 특정인이 진급했을 경우 그의 부친은 물론 부인의 호칭까지 지위 정도가 상승하는 것을 말한다. ▲ 강세황의 시문으로, 그는 오저가 좌천의 실의를 겪을 때마다 시문을 지어 친구인 오저를 위로했다.
강 학예사는 "지역고서 조사 과정에서 입수한 오저의 교지는 무려 30여점에 달한다"며 "이는 그가 40년 안팎의 관료 생활을 하면서 근무지를 서른번이나 바꾼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이와함께 "오저는 그러나 정3품의 사헌부 장령으로 있다가 관료 후배들의 모함을 받아 종6품의 '성환도 찰방'(지금의 천안 우체국장 정도)으로 발령받기도 한다"며 "이는 그가 약한 문벌을 지녔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사헌부 장령은 지금의 감사원 국장급에 해당하는 자리로, 당시 앞선 전례를 보면 이곳서 근무한 관료들 대부분은 판서 등 정2품(지금의 장관직)으로 승진하는 예가 많았다.

▲ 오저가 받은 성환도찰방 교지로, 성환도찰방은 지금의 천안 우체국장에 해당한다. 오저가 정3품에서 종6품으로 떨어진 시기로, 좌천 폭이 가장 컸다.
그러나 이번에 전시되는 오저의 각종 교지는 ▶좌천당하고 ▶좌천 끝에 복직하고 ▶또 다시 좌천을 당해 벼슬을 내놓는 등 조선조 한 지식인의 굴곡 많은 관료 생활상을 여과없이 노정하고 있다.

강 학예사는 이같은 원인의 주된 이유로 오저의 가문이 당시로서는 권력 마이너리티인 '소북인'에 속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따라서 오저의 가문은 당시 집권계열인 '노론계'가 아닌, 동류 집단인 소북계와 결혼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분석은 오저의 교지를 맥락적으로 살펴 본 것으로, 그의 좌절 많고 복잡했던 심리는 평생동지였던 표암 강세황의 사문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오저와 강세황은 동갑이자 먼 친척일 뿐 아니라 청원 낭성(오저)와 대전 회덕(강세황)에 거주하는 등 거리적으로도 매우 가까웠다. 강세황은 오저가 매번의 인사 때마다 좌절을 겪자 그가 올렸던 사직글(상소문) 뒷면에 그를 위로하는 글을 여러편 남겼다. 이중 1편을 번역문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시문중 작은 글씨 부분)

'장헌(장령)이었던 친척 吳士晦(士晦는 오저의 字)가 내가 사는 성남의 집에 머물러 있은지 5달… 벼슬을 내놓고 서원(청주 지칭)의 옛 집으로 돌아갈 적에 서로 같이 있으면서 갑자기 작별을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막연하게 하였다(…) 표옹 쓰다'.

'표옹'은 강세황의 또 다른 지칭으로, 오저가 좌천에 따른 실의 끝에 벼슬을 내놓자 이를 위로하기 위해 쓴 싯귀로 보여지고 있다.

강 학예사는 "조선시대 한 선비의 과거 답안지, 교지, 간찰 등이 일대기적으로 존재하는 예는 전국적으로 거의 유일무이하다"며 "오저가 남긴 각종 고문헌은 문화재 지정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 조혁연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