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주변, 하나같이 풍부한 논 토양 존재

충북대 김범철 교수 새 주장

청동기 고인돌은 지배 계급자의 단순한 무덤이 아니며, 당시 토지 점유의 경계 표시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벼재배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충북대학교 박물관(관장 박선주 교수)이 올 제 14기 박물관 과정을 지난달 시작한 가운데, 얼마전 같은 대학 김범철(고고미술사학과) 교수가 수강자들을 상대로 '선사인의 생활과 문화' 제목의 강의를 했다.고인돌은 국내 전역에 5만여기나 분포하면서 '한반도=고인돌의 나라' 이미지를 심어왔다. 지금까지 청동기 고인돌은 다소의 이론이 있으나 당시 지배 계급자의 무덤이라는 설이 정설의 위치를 확보해 왔다. 그러나 김 교소는 이날 강연에서 고인돌이 무덤인 것은 맞으나 ▶단순 신앙물을 넘어 당시 엘리트(상위 유력자)의 토지 점유권 확장과 관련이 있고 ▶나아가 이는 벼재배 문화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했다.그는 이 이론을 전개하기 위해 한반도 벼재배 문화의 변화 과정을 먼저 설명했다.그에 따르면 신석기 시대부터 직접 재배되던 벼는 청동기 중기(8~4세기)에 이르러 밭벼에서 상당수 논벼로 전환되면서 이른바 집약재배 현상이 일어났다.김 교수는 "이같은 현상은 벼가 단순한 식량용이 아닌 조세와 급여의 매개재로 떠오른 것을 의미한다"며 "이는 당시 사회 구조가 정칟경제적으로 다원화 길로 들어섰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 청동기 고인돌은 당시 지배 계급자의 단순한 무덤이 아니며, 토지 점유권 확장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국내 최대 크기인 강화도 고인돌 모습.
고고학적 현미경을 들여다 본 결과, 한반도 고인돌은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축조됐다고 김 교수는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 김 교수는 ▶당시 엘리트 계급은 사회가 다변화하면서 토지 점유권을 늘리기 시작했고 ▶그 점유의 경계 표시로 경관좋은 곳에 거석인 고인돌을 집중적으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부연 설명으로 "고인돌이 세워진 곳의 주변에는 하나같이 풍부한 논토양이 존재하고 있고, 또 농사와 관련된 석기들이 높은 비율로 출토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무덤 주인공은 당시 족장급 최고 지배계급이지만 이를 경제적으로 후원한 사람은 상위 유력자로 보여지고 있다.

김 교수는 이 부분을 "당시 상위 유력자들은 고인돌 축조를 경제적으로 후원한 대가로 이념의 정당성과 함께 토지 점유권 확대를 부여받았을 것"이라며 "당시 엘리트들은 그 과정을 통해 지역 정치세력의 구심체 역학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편 당시 고인돌을 세우는데 동원됐던 인력들은 노동에 따른 반대 급부로 집단적 향연(잔치)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됐다.

그는 "고인돌과 관련된 대형 취락에는 단도마연토기가 압도적으로 많이 발굴된다"며 "이 토기는 당시 잔치에 사용됐던 토기들"이라고 밝혔다. / 조혁연

# 고인돌 유래설

전문가 사이에 3가지 설이 제기돼 있다. 지하에 설치된 돌널무덤(石棺墓)이 지상화되어 고인돌로 발전했다는 자생설과 만주지방에 분포한 대석붕(大石棚)의 영향을 받아 발생했다는 설이 있다.

이밖에 남아시아의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유입으로 발생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최초 발생 시기도 청동기를 뛰어넘어 신석기 후기로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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