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도시계획 개념하에 서원경 축조

중앙문화재연구소 도문선씨 주장

지난 2006년 발굴된 청원군 쌍청리 통일신라의 7중 다중환호는 직할촌 서원경(지금의 청주)의 'GP'에 해당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당시 서원경의 치소(행정중심 기관이 위치한 곳)는 청주읍성~남석교 사이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주장도 함께 제기됐다.

중앙문화재연구원 도문선(36) 씨가 얼마전 한국고대사학회 학회지에 '청원 쌍청리 다중환호의 축조 노력 검토' 제목의 논문을 기고했다.

▲ 다중환호의 모습을 실은 청원 쌍청리 보고서.
지난 2006년 중앙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된 쌍청리 다중환호(일명 양오가불 환호)는 청동기~삼한시대보다 훨씬 늦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져 국내 사학계의 적지 않은 관심을 끌었다.

특히 '촌주'(村主), '관'(官) 자 등이 새겨진 명문 기와편이 발굴돼 학계의 또 다른 관심을 끈 바 있다. 기와는 그 제작 공정상 고화도로 소성할 수 있는 가마가 필요하다. 때문에 일반 여염집이 아닌 관부, 사찰 등 제한적인 건물에만 사용됐다.

이와 관련 도 씨는 7중으로 형성된 쌍청리 다중환호에 대해 ▶당시 서원경의 외곽 방어선 역할을 했고 ▶동시에 철제품 생산기지 역할을 했으며 ▶신라장적 등을 참고할 때 당시 일대에서는 수전을 중심으로 한 농업경영이 활발히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는 첫번째에 대해 "쌍청리 환호는 서원경서 15㎞, 부모산성서 5㎞ 정도 떨어져 있는 등 당시 서원경 세력권의 최외곽에 위치하고 있다"며 "이는 쌍청리 환호가 직할촌 서원경의 방어적 관방시설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철제품과 관련해서는 "다중환호 세력권인 인접 청원 만수리, 연제리 등에서 제련시설이 발굴된 바 있다"며 "따라서 당시 쌍청리에서 서원경이라는 수요처를 상대로 각종 철제품을 생산·납품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후자에 대해서는 "통일신라기에 들어서면 각종 철제 농기구 제작과 함께 우경(牛耕)이 시작된다"며 "따라서 당시 철제품 생산지로 기능한 것을 감안할 때 쌍청리에서는 넓은 미호천 들녘을 바탕으로 수전 농업경영이 활발히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도 씨는 이같은 역사 정황을 종합, ▶통일신라는 치밀한 도시계획 개념하에 직할촌 서원경을 축조했고 ▶그 외곽 방어성은 동-상당산성, 서-부모산성, 북-정북토성 등이며 ▶쌍청리 다중환호는 외곽 방어선에서 조금 더 나아간 지금의 'GP' 개념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GP'는 GOP(휴전선)에서 조금 더 전방으로 나아간 전진기지로, 평시에는 정찰 임무를 수행하나 전쟁이 일어날 경우 최전선 방어시설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도 씨는 진흥왕이 남석교(南石橋)를 수선한 사실을 들어, "당시 서원경의 치소가 청주읍성~남석교 사이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같은 사실은 당시 서원경이 남석교와 읍성을 중심으로 남북대로로 연결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그 남북대로 주변에는 격자 모양의 소규모 도로가 연결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조혁연

hycho@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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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중환호

호 등을 파 마을의 외곽을 방어하는 시설로, 청동기와 삼한시대에 집중적으로 조성됐다. 그러나 삼국시대 들어 축성술이 발달하면서 산성과 토성으로 그 기능이 대체됐다.

청원 쌍청리 환호는 그 축조시기(통일신라 7세기 무렵)가 이례적으로 늦고, 또 7중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국내 역사 고고학계의 관심을 끈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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