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순희 / 시인
오늘도 대학 2년생인 아들과 냉전중이다.

내 말을 듣기 싫어하는 눈치라 말하지 않고 눈치만 보며 지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내가 자식에게 지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속내는 그렇지 않다. 나를 대하는 아이의 태도는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동안 아이의 생각을 인정하거나 존중해 주기보다 엄마라는 권위로 내 논리만 주장해 오는 동안 아이의 마음속에 맺히고 영근 쓴 열매를 거두고 있는 중이다. 흙탕물이 시간이 지나면 맑아지듯이 아이의 마음에서 엄마에 대한 미움의 부유물들이 가라앉을 때까지 고요하려고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엄마, 엄마, 엄마' 하며, 설거지하고 있는 나에게 세 아이들이 한꺼번에 쪼르르 달려와 무언가를 이야기하려고 했었는데, 아이들이 커 가면서 주고받는 말 수가 줄어갔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엄마는 이렇게 말하겠지' 생각하면서 엄마에게 활짝 열려 있던 마음 문을 조금씩 닫아 갔나 보다.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들의 입장에서 함께 고민하지 못하고, 교과서식의 답변으로 아이들을 주눅 들게 하고 답답하게 했던 무지한 함량미달의 엄마였던 내 모습을, 엄마를 대하는 아들의 모습 속에서 본다.

자신의 말이나 생각이 존중받지 못했을 때 '내가 무시당했다'는 느낌으로 이어지고, 반사적으로 상대방을 무시하는 마음이 형성되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생존본능이다.

아이가 커 가면서 부모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자아의 성장'이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자라면서 자기의 생각과 뜻이 상대방의 생각과 뜻에 부딪혀 꺾일 때마다 반사적으로 마음이 단단해져 간 것이 아닐까.

거부당하고 무시당한 만큼 고집 센 아이가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그 아이의 삶을 지탱해 나가는 힘이 되어 주고….

공부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 학생이 책을 함부로 다루는 모습을 보며, '저렇게 책을 무시하면 책도 저 아이를 무시할 텐데….'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생명 없는 책도 무시당하면 똑같이 무시당한 만큼 되돌려주는 게 이치인데 하물며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랴!

우리는 살려고 하는 생명체에 둘러싸인 살려고 하는 생명체이다. 잘 살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무지해서 좋은 엄마가 못되었듯이, 무지해서 한번뿐인 인생길을 그릇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무엇을 향해 숨 막히는 더위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허위허위 가고 있는 걸까.

내가 무시한 모든 것들이 내 그림자가 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내 발목을 붙잡는다. 세월은 흐르는데 나는 늘 그 자리이다. 생명의 산실인 자연의 신음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법과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 능력 있는 한국인을 기르기 위해 자녀교육에 헌신하는 이웃집 젊은 엄마에게 고마워하고 대견해해야 한다.

힘겨운 일터에서 인내하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믿어주고 격려하는 눈짓들이 오가야 한다. 가족들의 눈빛이 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 그들이 잘 사는 것이 바로 내가 잘 사는 길이기엡.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