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나고 난 뒤…"

# "명심해, 이건 연습이 아냐"

그들의 첫 번째 정사에서, 왕치아즈(탕 웨이)는 속수무책이었다. 어두운 곳을 싫어하며 누구도 믿지 않는 남자 이(易, 양조위). 난공불락과도 같았던 그의 철저한 '계(戒)'를 드디어 '색(色)'이 접수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오판한 건, 역시 의욕만 앞서는 아마추어다웠다. 이 틈을 노회한 이는 놓치지 않았고, 맹수처럼 여자를 공격한다. 때리고, 찢고, 밀어붙이며 경고하는 것이다. 자신과 '놀기'를 원한다면 좀 더 '연기'를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을.

▲ 째지는 노래를 듣고 있는 일본군들 틈에서 남녀는 비로소 편안하다. 여자가 건넨 잔을 받아 마시고, 자신의 손을 잡은 여자의 손에 나머지 손을 포개며 남자는 어쩌면 처음으로 두려움에서 자유롭다. 순간, 그의 눈에서 투명한 액체가 반짝일 때, 돌이킬 수 없는 장렬한 파국은 그들 앞으로 바짝 다가선다. 명실상부한 '코스모폴리탄' 리 안(李安)감독의 '색, 계(Lust, Caution)'에서는 역시나 세 차례의 정사장면이 핵심이다. 목숨을 걸고 치러지는 두 남녀 간 겨루기의 시작-중간-끝이 내러티브를 요약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거의 일방적인 것처럼 보이는 첫 번째 정사는 1940년대 상해를 배경으로 한 '미녀 스파이의 친일 매국노 제거극'에 흥미를 더한다. 이가 떠난 후 처참하게 침대에 널브러졌던 왕치아즈가 짓는 회심의 미소가 두 번째, 세 번째 정사의 역전을 암시하는 것이다.그 문제의 정사에서 왕치아즈는 남자의 두려움을 본다. 일제의 더러운 군홧발에서 조국을 구하려는 투쟁가들의 피로 몸을 씻고 세속의 영화를 더하는 이는 두려움 때문에 허리띠를 휘두르지 않고는, 여자의 얼굴을 저만치 돌려놓지 않고는 몸을 열지 못한다. 절정의 순간에도 눈 감지 못하던 그가 두 번째 정사에서 왕치아즈의 '상위(上位)'를 허용하고, 눈을 감으며, 살짝 미소 짓기까지 하는 건, 그렇다면 잉그리드 버그만을 열망하던 배우지망생이 펼친 열연의 성과일 것이다.# 아무도 그녀를 지켜주지 않는다하지만 이에게 접근했다 실패했다던 전문배우들은 알았던 것을 아마추어 배우 왕치아즈는 알지 못했다. 내 존재의 사슬로부터 해방되는 초월의 순간을 무대에서 맛보기 위해서는 몸과 함께 영혼도 거래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일본군 조계지에서 그녀가 부르는 노래-"고난 속에서도 꿋꿋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오, 나의 아름다운 사랑/우리는 영원히 함께 하는 바늘과 실…"-는 더 이상 항일 저항군 기획, 광위민(왕리홍) 연출, 왕치아즈 주연 연극의 절정부에 배치된 삽입곡이 아니다. 이와 함께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정됐던 비극적 피날레. 6캐럿짜리 핑크 다이아반지를 손에 끼워준 이가 비호처럼 날래게 사지(死地)를 탈출한 뒤 왕치아즈는 거리로 나선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다. 저녁밥을 하기 위해 빨리 돌아가야만 하는 어느 아낙의 집 같은 건 처음부터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았었다. 자살용 독약을 삼키는 대신 죽음만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그녀는 자신의 운명에 순응한다. 아니, 순응할 수밖에 없다.그러니 거대한 괴물의 벌린 입처럼 보이는 채석장 앞에 무릎 꿇린 왕치아즈의 얼굴엔 두려움이 보이지 않는다. 조만간 영국으로 데려가겠다던 아버지의 약속이 허언이 되고, "널 다치게 안 할 거야" 다짐하던 첫사랑도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지켜줄게" 실오라기 하나 없을 진심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며 '괴물'의 얼굴로 돌변하는 것도 찰나였다. 모든 이들이 구경만 하는 동안 사력을 다해 펼쳤던 '적과의 공연(共演)' 내내 뼛속 깊이 스몄던 외로움은 마지막 순간의 두려움마저 이미 잠식했던 것이다.영화 '색, 계'는 커다란 개의 클로즈업으로 시작해서 수시로 개를 보여주다가, 사람이 앉았던 흔적만이 남은 빈 침대로 끝난다. 영문을 몰라 하는 아내(조안 첸)에게 이는 "당신은 내려가서 계속 놀아"라고 말하고, 마작에만 열중하며 노는 것이 자신의 몫임을 알고 있다는 몸짓으로 그녀가 내려간다. 멈출 수 없는 자신의 '놀이'를 위해 이마저 그 방을 떠날 때,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좀 더 또렷해진다. 운명의 잔혹한 '계' 아래서 인간은 개이거나 꼭두각시이거나일 뿐이라는 것이. / 박인영·영화 칼럼니스트

# 이 영화는

■양조위 = 리 안 감독은 "모든 감독의 꿈"이라 했고 누군가 "무엇을 해도 용서되는 배우"라 말한 양조위(1962년생)는 왕치아즈의 성장영화로 갈음되는 '색, 계'에서도 여전히 시선을 압도한다. '나쁜 남자'의 DNA 자체가 없는 것처럼 악역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의 존재는, 친일 매국노, '왜놈들의 개' 이에게 풍부한 깊이를 더한다. 비열하고 냉혹한 가운데 알 수 없는 여백을 갖는 인물로, 절체절명의 위기감 속에서 두려움에 떠는 한 남자로 이를 관객에게 설득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배우 양조위로부터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상처나 연민, 슬픔은 영화 '색, 계'를 종종 위험하게 몰고 가는 원인이 된다. '공공의 적'-양조위에 대한 관대한 동일시는, 일종의 정치적·역사적 면죄부가 되어 자칫 영화의 '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사장면 = 미국에서 NC-17등급을 받았고, 중국에서는 30분 삭제 후 개봉될 수 있었던 20분에 걸친 3차례의 정사 장면은 감독과 배우들, 촬영, 조명, 음향 감독 등 소수 인원들만이 참여해 11일 동안 가장 먼저 촬영됐다. 그러나 마구 부풀려진 소문보다도 더 노골적이고 놀라운 육체들을 전시하는 이 장면들이, 영화가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주목할 만한 한 태도로 기억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다. 차라리 살벌한 전쟁 액션 장면이라 불러 마땅할 세 차례의 정사는 '색'과 '계'의 팽팽한 쟁투와 상승작용을 통해 캐릭터를 효율적으로 소개하고, 감정 변화를 용의주도하게 설득하며, 관객들을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도록 몰입시킨다. 그토록 적나라하게 다 보여주는데도 관음증을 충족시키기보다 차라리 두려움의 전율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이 장면들은 진정 놀랍다. 물론 배우들의 '투신(投身)'이야말로 길고 열렬한 박수의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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