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1946년 작 '오명(Notorious)'을 통해 '서스펜스의 제왕' '스릴러의 대가'의 명성을 확고히 한다. 하지만,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
나치 잔당, 스파이, 지하 와인 창고, 우라늄 등의 스릴러적 설정과 플롯은 차라리 '맥거핀'(모든 사람이 관심을 갖지만, 정작 플롯 진행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히치콕 영화의 어떤 사물)이라 할 만하며, 그럴 때 영화는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의 치명적 멜로드라마로 다가오는 것이다.
나치 협력자 아버지를 혐오하는 딸 앨리시아(잉그리드 버그만)를 리우 데 자네이로의 나치 조직 내부로 침투시키려던 정부요원 데블린(캐리 그란트)은 첫 눈에 그녀에게 사로잡힌다. 그런데도, 여자를 세바스찬(클로드 레인스)에게 보낸다. 이 선택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냉정한 표정과 함께 정부요원으로서의 단호한 의무감, 국가에 대한 깊은 충성 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
■ '영화사상 가장 긴 키스신' = 수많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시켰던 당시 영화의 광고 문안은 3초 이상 키스를 금하던 당시 할리우드 제작 규범을 회피하기 위한 히치콕 감독의 고육지책 덕분에 만들어졌다. 2분 40초 동안 롱 테이크로 촬영된 이 장면에서 캐리 그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은 호텔 베란다에서 키스를 나눈 후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은 채 대화를 나누고 전화를 받으며 호텔방을 가로지르는 행위 중간에 계속 입을 맞춘다. 저녁거리 메뉴를 고민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가 서로에게 매혹된 남녀의 성적 흥분을 오히려 강화시킨다. 노회한 감독의 연출에 정작 잉그리드 버그만은 불쾌해했다지만, 스크린의 에로티시즘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명불허전의 장면.
■ '불쌍한' 세바스찬 = '오명'의 해피엔딩은 개운치 못하다. 억압적인 어머니로부터 간신히 벗어나는 독립선언을 감행하며 결혼했지만, "어머니, 저는 미국 스파이와 결혼했어요", 절망 속에 읊조리던 세바스찬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클로드 레인스가 분한 세바스찬은, 키 크고 젊은 선남선녀 사이에 낀 '사랑의 훼방꾼' 캐릭터로 명백한 악의 축에 속한다. 하지만 키 작고 잘 생기지 못했으며 나이까지 많은 이 캐릭터가 사랑과 신뢰에 관한 한 두 남녀 모두를 압도하는 진정성을 보이면서, 기묘하게 비틀린 이들 삼각관계의 최대 피해자로 각인되는 것이다.
■ 계단 장면 = '오명'에는 영화 스타일의 진화를 증명하는 명장면들이 즐비하다. 부감의 롱 숏에서 잉그리드 버그만 손에 든 열쇠를 잡는 클로즈업으로 단 한 번에 연결하는 파티 장면과,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는 마지막 계단에서의 탈출 장면은 특히 감독의 탁월한 역량을 아낌없이 과시한다. 1분 20초 동안 계속되며 네 명의 주인공과, 1층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나치 조직원들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 장면은, 왜 히치콕이 서스펜스의 제왕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