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죽일 놈의 사랑 같으니…"

# 차갑게 식은 저녁식사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1946년 작 '오명(Notorious)'을 통해 '서스펜스의 제왕' '스릴러의 대가'의 명성을 확고히 한다. 하지만,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 나치 잔당, 스파이, 지하 와인 창고, 우라늄 등의 스릴러적 설정과 플롯은 차라리 '맥거핀'(모든 사람이 관심을 갖지만, 정작 플롯 진행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히치콕 영화의 어떤 사물)이라 할 만하며, 그럴 때 영화는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의 치명적 멜로드라마로 다가오는 것이다.

나치 협력자 아버지를 혐오하는 딸 앨리시아(잉그리드 버그만)를 리우 데 자네이로의 나치 조직 내부로 침투시키려던 정부요원 데블린(캐리 그란트)은 첫 눈에 그녀에게 사로잡힌다. 그런데도, 여자를 세바스찬(클로드 레인스)에게 보낸다. 이 선택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냉정한 표정과 함께 정부요원으로서의 단호한 의무감, 국가에 대한 깊은 충성 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

▲ 키스-"나가지 말고 여기서 저녁 먹어요/요리하는 거 싫어하잖소?/닭 요리 하면 돼요"-키스-"접시는 몇 개가 필요할까?"-키스-"호텔에 전화 메시지를 확인해야 하오"-키스-"와인 어때요?/저녁은 7시쯤 해요"…. 오랜 시간의 헤어짐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 연인들은 좀처럼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처음 뒷모습으로 등장해서 종종 뒷모습을 보이는 데블린은 늘 "(모든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소"라고 말한다. 그저 '단 한 마디의 말로' 여자를 '중단시킬 수 있는데'도 "누구도 당신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며 뒷걸음질 친다. 그는 두려운 것이다. 그녀에게로 기우는 자신의 마음이, 아름다운 앨리시아에 대한 가눌 수 없는 갈망이. 그녀와 함께 할 때마다 수세에 몰리곤 하는 자신을 어떻게든 보호하기 위해 그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여자에 대한 신뢰보다 회의(懷疑)의 편에 선다. 그래서 아름다운 바닷가를 배경으로 차려진 저녁식사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차갑게 식어간다. # 이제야 오신 매정한 당신…"당신에게 항상 내 손을 잡을 기회를 주죠. 두려워할 것 없어요." 앨리시아는 진심으로 말하지만 데블린이 그녀의 제안에 반응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의 두려움에 떨며 스스로를 보호하는 데만 급급하던 남자가 '구원의 영웅'으로 환골탈태하는 시간은, 얄궂게도 여성에게 가혹한 속죄의 과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국가 반역자의 딸, 방탕한 여성의 '오명'을 씻고, 호텔서 그랬던 것처럼 앞치마 두른 채 귀가하는 남편을 위해 닭요리 하는 여성이 되기 위해서 그녀는 혹독한 죄 씻음의 과정을 거친다. 눈부시도록 빛나는 앨리시아/잉그리드 버그만의 아름다움과 젊음의 생기는 독의 기운으로 퇴색되며, 남성을 수세로 몰던 적극적인 섹슈얼리티는 효과적으로 지워지는 것이다. 그 때문에 리안 감독의 영화 '색, 계'에 밑그림을 제공하는 '오명'의 사랑은, 차라리 죽음을 부를 만큼 어리석은 저주가 된다. 세바스찬과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앨리시아의 말 옆구리를 차는 데블린은 마치 포주처럼 자신의 여자를 '제공'하며 임무 수행과 질투의 아찔한 곡예를 펼친다. 자신의 지루한 삶을 환하게 밝혀준 아내의 손-과 그 안에 든, 죽음을 재촉하는 열쇠-에 허리 굽혀 키스하는 세바스찬은, 왜소한 몸 때문에라도 더욱 비극에 적당해 보인다.앨리시아가 데블린에게 듣고 싶었던 한 마디는 "당신을 사랑하오" 혹은 "당신을 믿소"였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말을 그녀는 죽음의 문턱에서야 듣는다. 길었던 기다림에 지쳐 저벅저벅 다가오는 죽음만이 차라리 위안이 되려는 바로 그 때, 독 기운으로 시름시름 죽어가던 공주를 구하고자 백마 탄 왕자가, 드디어, 성문을 부수고 나타난 것이다! 그 절묘한 등장에 어울리게 "당신을 사랑하오. 오래전부터, 언제나, 처음부터…"의 대사도 잊지 않은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에는 행복이 그득하다. 마치, 단 한 순간의 고통도 경험하지 않았던 여자처럼. 박인영 / 영화 칼럼니스트# 이 영화는
■ '영화사상 가장 긴 키스신' = 수많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시켰던 당시 영화의 광고 문안은 3초 이상 키스를 금하던 당시 할리우드 제작 규범을 회피하기 위한 히치콕 감독의 고육지책 덕분에 만들어졌다. 2분 40초 동안 롱 테이크로 촬영된 이 장면에서 캐리 그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은 호텔 베란다에서 키스를 나눈 후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은 채 대화를 나누고 전화를 받으며 호텔방을 가로지르는 행위 중간에 계속 입을 맞춘다. 저녁거리 메뉴를 고민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가 서로에게 매혹된 남녀의 성적 흥분을 오히려 강화시킨다. 노회한 감독의 연출에 정작 잉그리드 버그만은 불쾌해했다지만, 스크린의 에로티시즘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명불허전의 장면.

■ '불쌍한' 세바스찬 = '오명'의 해피엔딩은 개운치 못하다. 억압적인 어머니로부터 간신히 벗어나는 독립선언을 감행하며 결혼했지만, "어머니, 저는 미국 스파이와 결혼했어요", 절망 속에 읊조리던 세바스찬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클로드 레인스가 분한 세바스찬은, 키 크고 젊은 선남선녀 사이에 낀 '사랑의 훼방꾼' 캐릭터로 명백한 악의 축에 속한다. 하지만 키 작고 잘 생기지 못했으며 나이까지 많은 이 캐릭터가 사랑과 신뢰에 관한 한 두 남녀 모두를 압도하는 진정성을 보이면서, 기묘하게 비틀린 이들 삼각관계의 최대 피해자로 각인되는 것이다.

■ 계단 장면 = '오명'에는 영화 스타일의 진화를 증명하는 명장면들이 즐비하다. 부감의 롱 숏에서 잉그리드 버그만 손에 든 열쇠를 잡는 클로즈업으로 단 한 번에 연결하는 파티 장면과,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는 마지막 계단에서의 탈출 장면은 특히 감독의 탁월한 역량을 아낌없이 과시한다. 1분 20초 동안 계속되며 네 명의 주인공과, 1층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나치 조직원들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 장면은, 왜 히치콕이 서스펜스의 제왕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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