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은…"

# 소년, 소년을 만나다

로데오 선수로 입에 풀칠하고 사는 잭 트위스트(제이크 질렌할)는 1963년에도 양치기 일을 맡아 브로크백 산으로 간다. 지난 해 여름에는 벼락을 맞아 양을 마흔 두 마리나 잃었었다. 관리인은 길길이 날뛰었지만 "내가 벼락을 무슨 재주로 막나" 싶었다. 하지만 이번 해에도 마찬가지. '어떤 재주로도 막을 수 없는' 어떤 사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느닷없이 나타나 혼절하게 만드는 곰과, 양떼를 노리는 코요떼 무리들, 허구한 날 물리도록 먹어야 하는 콩 요리와 높은 하늘,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늘 그 자리에 있는 브로크백 산. 더 이상 있어야 할 것도,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것도 없다. 그와 나, 나와 그 둘이 함께 한다면…. 퓰리처상 수상작가인 애니 프루의 단편을 리 안이 영화화한 '브로크백 마운틴'(2005)에서 눈빛 촉촉한 잭과 말수 적은 에니스(히스 레저)가 함께 텐트에서 겪었던 그날 밤 일은 그들에게 말 그대로 '벼락'과 같았다. 11월에 약혼녀 알마(미셸 윌리엄스)와 결혼이 예정된 스무 살 에니스와, 바의 여자들에게 작업깨나 걸었을 법한 스무 살 잭은 다음 날 서둘러 사태를 수습하고자 한다-"난 게이가 아냐" "나도 아냐". 하지만 소용없는 일. 그러니 이들에게 벌어진 일은 천둥이나 벼락, 지진과 같은 자연현상과 다를 바 없다.결국 자신들이 맞닥뜨린 그 압도적인 감정 앞에서 삶의 경험도, 배움도 일천했던 스무 살 청년들은 이성으로 헤아리거나 거역하기를 포기한다. 코요테의 이빨로부터 양떼를 지키며 허구한 날 콩뿐인 식사로 연명하며 그들 일생의 가장 행복했던, 다시는 만나지 못할 '화양연화(花樣年華)'를 만끽하는 것이다. 그래도 되었다. 브로크백 산은 그들만의 '에덴동산'이었으니까. ▲ 위태로웠던 스무 살 열정이 봉인된 듯 눌러앉은 피딱지가 그대로인 잭의 옷 위에 자신의 옷을 겹쳐 허름한 옷장에 걸어두었다. 브로크백 산의 사진과 나란한 그 옷들을 아침 저녁으로 보니, 적막한 저 창문 바깥의 세상도 그럭저럭 견뎌낼 만하다.
# 다신 그 산에 가지 못하리

아직 창창한 나이 마흔에 잭이 느닷없는 죽음을 당하면서 둘의 사랑의 연대기는 종말을 고한다. 교통사고였다고 그의 아내 로린(앤 헤서웨이)은 말하지만, 스크린에서는 남자들에게 무참하게 폭행당하는('게이 배싱gay bashing') 잭을 보여주는 에니스의 상상장면이 펼쳐진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에게 어깨를 붙잡혀 끌려가다시피 해서 보았던 바로 그 장면, 단지 남자와 함께 목장을 경영한다는 이유만으로 성기를 뽑혀 죽어 널브러졌던 어떤 남자의 모습에 고스란히 잭이 오버랩되는 것이다.

잭의 죽음의 실제 경위를 밝히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이 장면을 굳이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사회적 금기에 따른 억압으로 고통 받는 나약하고 고독한 인간들의 슬픔에 깊게 공명한다. 양과 코요테, 그리고 자신들만 있었던 브로크백 산에서는 가능했으나 그 산에서 내려와서는 불가능했던, 합일의 순간을 꿈꾸며 감수해야하는 '내장을 끄집어내는 듯한' 고통의 아득한 깊이를 힘주어 설득하는 것이다.

서로를 열렬히 그리워하는 한 이 세상에서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명백한 결말에 다다르지 않기 위해 둘은 필사적으로 노력했었다. 단 둘만 있을 때조차 번번이 거친 육박전으로 부드러운 손길과 다감한 밀어를 대신해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두 딸과 한 아들의 아버지로, 매달 250달러의 양육비를 벌기 위해 고단하게 노동해야 하는 자로, 혹은 돈의 노예가 돼가는 아내와 세상의 변화를 속절없이 바라보아야만 하는 이름뿐인 가장으로 근근이 버텨내기엔, 그들은 한없이 약하고 그래서 점점 지쳐갔었다.

작은 목장을 사서 소를 키우거나 따뜻한 남쪽으로 가서 살거나, 하여간 둘이 함께 하는 행복을 꿈꿀 수조차 없었던 에니스는 단 한 번도 "네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널 20년 동안 그리워했어"라고 잭처럼 말하지 못했었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가능한 한 오래, 끝이 보일 때까지 버텨야 할 뿐이라고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다짐하던 그는, 피딱지가 앉은 잭의 오래된 셔츠 앞에서 뒤늦은 한 마디를 건넨다-"맹세할게…". 이렇다 할 가구 없이 휑한 그의 트레일러에서 그의 맹세를 방해할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 박인영·영화 칼럼니스트

# 이 영화는

■ 히스 레저 = 에니스는 적게 말하고 드물게 표현하지만, 더 깊게 아프고 더 길게 고통 받는다. 호주 출신의 히스 레저는 자신에게 닥쳐온 엄청난 일을 요령껏 헤아릴 줄 몰랐기에 더욱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남자로 관객 앞에 불쑥 나선다. 에니스가 꼭 그랬을 것처럼 대사를 입 속에 넣고 우물거리며 연기한 히스 레저는 둔중한 무게감의 탁월한 배우 발견에 대한 관객들의 환호가 잦아들기도 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 충격을 주었다. 지난 1월 22일 약물과다복용으로 집에서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된 것. 극중 아내 알마를 맡았던 여배우 미셸 윌리엄스와의 짧았던 결혼으로 자신을 꼭 빼닮은 3살짜리 딸 마틸다를 두었기에 더욱 안타까운 향년 28세의 죽음이었다. 최근 '다크 나이트'(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어마어마한 악역 조커 연기로 더욱 그의 부재를 안타깝게 만든 "그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는 우리의 "좋은 친구였기 때문"('브로크백 마운틴' OST 삽입곡 윌리 넬슨이 노래한 밥 딜런의 'He was a friend of mine' 중에서)이다.

■ 동성애 영화(queer movie) =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브로크백 마운틴'이 아카데미 감독·각본·주제가상을 수상한 것은 충분히 이채로웠다. '게이 카우보이 로맨스'라는 가장 미국적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보수적인 미국 주류사회의 거부감이 막강한 현실을 감안할 때 이는 의미 있는 진전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남성들 간의 사랑을 다루면서도 사랑(불륜)의 원형적 상과 인간의 불우한 고독을 보편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동성애 영화의 협소함을 넘어 폭넓은 지지를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실패를 동성애 영화에 대한 할리우드의 거부감 때문으로 해석하는 시각은 그 자체로 이 소재에 대한 여전히 협소한 관용도를 반영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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