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아파트 마당에 꽃씨를 심은 화분 다섯 개가 다정하게 놓여있었다. 눈길이 갈 때마다 어떤 씨앗을 품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뾰족이 머리를 쳐들고 나올 때까지도 무슨 식물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어디에서 본 듯한 식물인데 생각이 나질 않아 그 화분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싹이 좀 더 자란 후에야 어렸을 적에 보았던 목화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누군가가 요즘은 통 볼 수가 없는 목화 꽃이 그리워 귀한 씨앗을 구해다 화분에 심었나보다. 화분은 불법주차를 막는 역할도 하여 더욱 눈길을 끌었고, 여름 내 나의 소중한 관심거리가 됐다.

팔월이 되면서 흰 꽃봉오리가 터지는가 싶더니 다음날 아침에는 꽃이 활짝 피었다. 꽃잎은 다섯 장으로 첫날은 엷은 우유빛깔 이더니 이내 연분홍색으로 변하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했다. 어느 꽃은 흰색, 백황색, 홍색으로도 변했다. 처음에는 순 백색꽃잎이 조화처럼 하늘거린다. 마치 웨딩드레스를 입은 새신부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연방 피고 변하는 모습을 보는 사이에 어느새 열매를 맺었다. 나는 목화 꽃이 그리 예쁜 줄은 모르고 유년시절을 지냈다. 벌, 나비도 없이 열매를 맺는 목화 꽃이 더욱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 망아지처럼 동네 친구들과 뛰어놀다 너무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와 혼쭐이 나곤 했었다. 그때는 요즘 아이들처럼 학원으로 빡빡하게 돌아다녀야 할 만큼 부모들이 학구열이나 가세가 넉넉하지 못했다. 기껏 가정 형편이 좀 나은 집 딸은 피아노 개인 지도를 받을 정도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책가방을 마루 끝에 팽개친 채 친구들과 어울려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놀았다. 그 시절에는 목화밭이 많았다. 친구들과 목화밭에서 다래를 따 먹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달큰한 그 맛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다. 약간 달면서도 비릿하다고나 할까? 어머니의 젖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은 아파트 마당 화분에 다래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지만, 그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아는 아이가 없는 것 같다. 안다 하더라도 간식거리가 넘치는 요즘의 어린이들은 아무런 관심조차 없을 것이다.

목화 꽃은 8~9월에 핀다고 하지만 아파트 목화 꽃은 10월인데도 연이어 피고 있다. 꽃의 모양이 삼각상 난형으로서 자줏빛이 돌기도 하는 날카로운 톱니가 있다. 꽃받침 잎은 술잔 같다. 꽃잎은 5개가 복와상으로 나열되고 연한 황색 바탕에 밑 부분이 흑적색이고 수술이 많은 단체單體이다.

왕성하게 자랄 무렵이면 퇴비를 주고 주변의 흙을 모아 줄기 쪽에 북돋아주는 작업도 해야 한다는데 내가 지켜보고 있는 화분의 목화 꽃는 더 이상의 작업을 해주지 않는데도 연방 꽃이 피고 다래를 맺는 모습이 신통하기까지 하다.

다래가 익어 갈색으로 변해 서서히 벌어지면 목화솜이 마치 솜사탕을 연상하게 한다. 그래서 목화 꽃은 일 년에 두 번 핀다고 하나 보다. 바로 이 목화솜꽃을 살짝 꼬아 당기면 실이 서서히 풀려 나올 것만 같다. 보통 9월 하순에 수확을 하게 되는데 수확하는 날짜에 따라서 솜의 질이 결정된다고 한다.

내가 시집 올 때는 목화솜 이불이 가장 비싸 경제적 부담을 느끼는 시대였다. 목화솜 이불만 장만하면 딸 시집보낼 걱정은 우선 해결되었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어머니의 손길이 담겨있는 혼수 이불 한 채가 이불장 안에 보관되어 있지만, 수십 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꺼내 덮어 본 일이 없다.

솜이불 이후 캐시미론 이불이 나왔고, 지금은 더욱 가볍고 따스한 얇은 차렵이불들이 나와 따뜻한 겨울을 보내는 시대가 되었다.

예전에는 딸을 시집보낼 때, 시부모에게 예단으로 목화솜 이불을 선물하기도 했다. 시부모는 새 며느리로부터 받은 이불을 덮고 며느리의 흠을 덮어주며 솜이불 같은 사랑을 곁들여 베풀었다. 그만큼 목화는 서민들에게 꼭 필요한 식물이요. 사랑받는 식물이기도 했다.

목화솜은 까만 씨앗을 꼭 감싸고 있다. 부드러운 솜이 씨를 감싸고 있어서 종자를 보호하는데, 인간이나 모든 생물들은 하나같이 종자를 보호하고 증식시키려는 본능을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 모습은 엄마가 새끼를 꼭 껴안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나 할까.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으로 감싸 안은 듯한 씨종자의 모습이 더욱 의미 있는 모습이 아닌가 싶다.

올해 수확인 다섯 그루의 목화나무는 종자역할을 할 것이다. 내년 봄에는 목화씨를 구해서 우리 집 베란다에도 한번 심어보고 싶다. 벌써부터 지난여름 내 끊이지 않고 피었던 목화 꽃의 자태가 더욱 아름답게 다가온다. / 김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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