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 마지막 세력 백제에 저항한 흔적

■ 연기 응암리 유적 학계 주목

지난달 발굴된 연기군 응암리 유적지가 마한의 마지막 잔존세력 읍지(邑址)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강하게 일고 있다.이것이 맞다면 당시 읍지는 한성백제의 남진과 청주역사 시원의 직전 시기를 고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어서 국내 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충북대박물관(관장 박선주 교수)과 한국고고환경연구소는 지난달 27일 청원군 부용면과 인접한 연기군 동면 응암리 409-7번지 일대(중부내륙화물기지 건설부지)에서 다량의 마한시대의 유적·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당시 발표에서 방형 주거지, 토기 가마터, 여로 곳의 소토 흔적, 환호, 부뚜막시설, 온돌 등의 유적이 발굴됐다. 환호(環濠)는 마을을 두른 도랑 모양의 방어 혹은 경계시설을 의미한다.이밖에 유물로는 마형대구, 철촉, 쇠도끼, 타날문토기, 심발형토기 등 마한시대를 대표하는 것들이 집중 출토됐다. 타날문토기는 두드려서 음양 문양을 낸 토기를, 심발형토기는 길쭉한 사발 정도를 의미하고 있다.이중 토기 가마터와 환호 등의 유적은 일단 이곳이 평범한 취락지가 아닌, 조직·규모화된 집단이 거주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출토 당시의 유물 상태가 고고학적 메시지를 많이 지니고 있어 국내 고고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소토는 말 그대로 불탄 흔적의 토양으로 여러 곳에서 발견됐고, 무기류인 철촉은 환호 안에서 수습됐다. 이밖에 생활용기인 토기류는 완형이 상태로 출토된 것이 많았고, 마형대구는 주거지에서 출토됐다. 불탄 흔적(위로 작은사진)과 함께 출토된 마한시대 토기류 모습. 나머지 사진은 철촉(아래쪽 작은사진)과 마구로, 당시 일대에서 긴박한 상황이 발생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에대해 성정용(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책임조사원은 ▶당시 외부 침입 등 긴박한 상황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마을 취락지 환호에서는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후 대형 화재와 함께 주민 탈출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마형대구의 경우 위세품(권력 과시용)이기 때문에 주로 무덤에서 출토된다"며 "그러나 이것이 주거지에서 출토된 것은 당시 긴박한 상황이 발생했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이밖에 온전히 발굴된 토기류를 언급, "이는 어떤 촉박한 상황이 발생해 이를 챙기지 못하고 몸만 빠져 나온 것을 의미한다"며 "이는 철촉이 방어시설인 환호에서 발결된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성 교수는 "이번 응암리 유적은 삼국사기 온조왕편에 나오는 마한 마지막 세력이 한성 백제군에 저항 내용과 일치하는 면이 무척 많다"고 밝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편 26년과 27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고 있다.

'秋七年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당爲他所幷 則脣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 錦峴二城 固守不下'(26년에 마침내 마한이 쇠약해지자 마한을 습격하여 그 國邑을 병합하였는데, 원산과 금현의 2성만 성을 끝까지 지키고 항복하지 않다).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2성이 항복하자 그 민호들을 한산 북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성 교수는 "이때의 성은 둔덕과 木柵으로 이뤄진 城柵 정도로 볼 수 있다"며 "삼국사기가 아닌 유물적 근거로 볼 때 마한 마지막 세력의 멸망 시기는 다소 늦춰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논리 전개가 맞다면 당시 동면 응암리 일대는 마한 마지막 저항지역인 원산성이나 금현성이 되고, 이때의 외부 침입자는 한성 백제군 셈인 되고 있다.

나아가 남진을 거듭하던 당시 한성 백제군이 동면 응암리를 접수한 후 청주에 진입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하고 있다. 즉 청주역사 시원의 직전 단계에 해당하고 있다.

이 경우 한성백제 남진→응암리의 마한 마지막 잔존세력 저항(4세기 초·중반)→한성 백제군 청주진입(4세기 후반) 등의 연대적 흐름이 자연스럽게 성립되고 있다. / 송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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