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규식 / 한남대 교수
벨기에는 작은 나라이다. 면적도 그렇고 인구도 천만명 남짓이니 지표상으로는 그다지 내세울 만한 것이 없어 보인다. 유럽 다른 어떤 나라보다 게르만 문화와 라틴 문화가 서로 영향을 미치고 충돌하며 때로는 조화를 이루면서 이룩된 벨기에 문화를 이야기할 때면 언어문제가 빠지지 않는다.

지금 지구상에서 한 국가안에서 언어로 인한 갈등을 빚는 곳이 어디 한 두 지역뿐이겠는가. 수 백년간 영어와 프랑스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캐나다 퀘벡이 맏형격이고 스페인의 카탈루니아와 바스크 지방에서는 스페인어와 토착 언어간 대립이 유혈사태와 분리독립문제로 비화되기까지 한다. 이탈리아, 스위스도 상충되는 언어로 인한 이런저런 잠재적 갈등요소를 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벨기에는 언어에 관해 굴곡많은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여기서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함께 공용어로 쓰이고 독일어도 일부 통용되는데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연방과 더불어 한 지붕 세 언어속 희귀한 성공사례를 보여준다.

물론 그 과정에서 충돌과 대립이 없을리 없었다. 특히 19세기 말∼20세기 초부터 언어갈등이 노골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어를 쓰는 남쪽 왈론계는 농업중심 사회로 정치적, 문화적 주도권을 쥐면서 북쪽 플라망인들을 알게모르게 무시해왔다는데 네덜란드계가 주류를 이루는 북부 플란더스에서는 역시 자신들이 마땅히 주류라는 생각으로 남부를 깔보면서 충돌이 심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두 언어의 갈등은 극도로 심화된다. 당시 벨기에 국왕은 내각과 상의하지 않고 벨기에 군대를 독일에 투항하도록 지시했는데 그 후 왈론의 반대에 부딪혀 왕위는 보두앵 국왕에게 계승되었고 국민투표 결정을 무산시킨 왈론계에 대항해 플란더스 지역의 단결력은 더욱 강화되고 격화된 지역감정은 정치, 사회에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참으로 복잡하고 다난한 벨기에의 현대사에는 늘 언어갈등이 바탕에 자리잡고 있었다. 1950년대부터 20여년간 벨기에 정당들은 언어권을 축으로 사분오열, 이합집산을 거듭한다. 우리나라 정당이 대체로 지역기반에 따라 명멸하는 것과 비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색채와 농도, 갈등구조에서 차이가 난다. 다른 언어권 지역간에는 상호교류나 혼인관계도 없을 정도로 반목이 지속되었다.

정치권의 지역대립이 마침내 국가분열로 비화될 상황에 이르자 벨기에인들은 비로소 더 이상의 소모적인 분쟁은 나라이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아래 1970년대부터 지속적인 헌법개정을 통해 1993년 연방제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양 언어권의 완충지대인 '브뤼셀 캐피탈' 지역의 역할이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힘든 과정을 거쳐 형성된 벨기에 민주주의는 네덜란드어권, 프랑스어권, 독일어권의 세 공동체와 플란더스, 왈로니아, 브뤼셀 캐피탈 등 세 지역정부로 나뉘어 합리적인 연방국가를 이루고 있다.

대화와 타협, 양보와 공존이라는 실리적인 상호이익을 앞세우는 실사구시의 지혜가 뚜렷하다. 벨기에에는 유럽의 중심이라 할만한 뛰어난 지리적 입지조건아래 구축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그리고 오래전에 자리잡은 나토 본부 같은 굵직한 국제기구 특히 유럽연합의 실질적 집행기구인 유럽집행위원회, 유럽의회 등이 위치하고 있다.

브뤼셀 캐피탈 자치지역 정부는 도시 재개발 정책과 주택난 해소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데 수도 브뤼셀 지역의 오랜 문화전통과 문화재 보존사업과 어떻게 충돌하지 않고 조화롭게 대처해 나갈까에 세계의 관심이 모아진다. 같은 민족과 언어, 같은 문화권인 우리나라에서 아직 갈 길이 먼 국민통합의 지혜를 강소국 벨기에의 성공사례에서 배울만하지 않을까. 이규식 / 한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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