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병선/ 교육평론가
이름을 건다는 것은 자신의 전부를 거는 것과 같다. 책무성을 높여준다. 실명제를 실시하는 이유다. 같은 맥락에서, 학교에서 학급실명제를 한다는 것도 학급을 책임 있게 경영하겠다는 소신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소신이 교육적이어야 한다는 것. 교육에 반할 경우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충청타임즈(2009.04.21)에 실린 학급실명제란 제목의 장학사 기고문 얘기다.

기고자는 실명제를 교사가 제왕처럼 군림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교실 안에 학생은 온대 간대 없고 오직 담임교사만 있었다. '한번 정해진 짝꿍은 절대 바꿔주지 않는다'는 대목에서는 소신을 넘어서는 비교육적 독선을 보였다. 이래서 담임 실명제가 아닌 '담임 선택제'가 필요하구나란 단서를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이유는 다음 내용으로 갈음하자.

교사들만 모르는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새 학년이 되면 학부모들이 기도하기 시작한다. 자녀가 좋은 담임을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다. 아니, 좋은 담임까지는 아니어도 보통의 담임을 만나게 해달라는 기원이다. 내 아이에게만 잘 해주는 교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은 아이들을 이해하려는 교사, 아이들과 소통하려는 교사를 원하는 기도다. 학부모들의 괜한 투정과 편견이 아니다. 기고자와 같은 불통(不通) 교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제 복 탓으로 돌리기에는 교사들의 책임이 크다.

좋은 만남은 좋은 결과를 낳고(善因善果), 잘못된 만남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다(惡因惡果). 건강한 교육철학과 상식을 지닌 담임을 만나면 다행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학생도 학부모도 일년이 괴롭다. 그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담임 잘못만나 방황하는 아이들이 있다. 사춘기를 겪는 시기에는 중요한 문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가 담임 선택제다. 일부 학교에서는 이미 실시하고 있다.

그동안 공급자 중심의 교육에 대해 학부모들의 인식은 매우 약했다.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의 역사적 환경과 문화가 암묵적으로 이를 강요해 왔고, 교육수요자들은 여기에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수요자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담임 선택제도 이런 사례의 하나란 것이다.

담임 선택제는 교육 수요자들이 교사의 학급경영관을 파악해서 자녀에게 가장 적합한 담임을 선택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학생의 성격 특성에 맞는 담임을 선택해 학습활동은 물론 생활지도상의 교육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담임과의 갈등으로 인한 학생들의 심리적 상처는 물론 이로 인한 여러 문제를 예방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공급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공되는 교육 콘텐츠를 질적으로 높이자는 시도다. 교육도 서비스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과거처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것이 담임 선택제의 또 다른 출발점이다.

학생과 학부모가 담임교사를 선택한다는 것이 교사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일선 학교에서 방과후 활동으로 교과담임 선택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이런 제도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특정 수업이 개설되면 학생들이 수업내용과 교사를 평가하여 참여여부를 결정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이런 면에서 담임 선택제는 교과담임 선택제를 확대한 것에 불과하다.

결론이다. 과거 교사가 절대군주처럼 군림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불통이 아닌 소통하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의 교사상이다. 담임 선택제를 스스로 불러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한병선/ 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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