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문섭 〈논설위원〉
자살을 하면 누가 가장 고통스러울까.

필자는 지난 23일 백범기념관에서 사단법인 한국강사협회 주관으로 열린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의 만남인 '문·사·철(文·史·哲) 특별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아주 귀중한 것을 깨우쳤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자살을 하면 자살한 사람이 고통이 가장 클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남아 있는 너(2인칭)의 심적 고통이 가장 크다는 것이었다.

'철학, 삶을 낯설게 성찰하는 기술'을 주제로 열린 이날 강의에서 강신주 교수는 자살에 따른 고통을 1인칭(나의 죽음)과 2인칭(너의 죽음), 3인칭(그들의 죽음)으로 분류할 때 죽는 자의 고통은 잠시 뿐이며, 남아 있는 자,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었던 너를 잃은 사람들의 슬픔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너'의 개념은 아내와 자식처럼 교환이 불가능한 단독성(Singularity)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의 설명대로 하면 자살하는 사람은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이승에서 심적 고통을 끝내고 오히려 행복을 누리게 된다.

반면 자살자를 '너'의 개념으로 인식했던 사람들은 이별이 시작되면서 헤일 수 없는 수많은 밤을 번민의 나날로 보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소식이 전해지면서 그의 죽음을 제3자적 시각이 아닌 '너'의 죽음으로 인식한 사람들이 많음이 확인되고 있다. 그만큼 그는 서민 대통령으로써 국민의 사랑을 받아왔기에 이처럼 추모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신이 입관되던 날 초점을 잃은 채 휠체어에 실려 나타났던 권양숙 여사의 초췌한 얼굴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겪는 '너'의 모습이 감지됐다.

권 여사의 아픔을, 고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유언에서 말했듯이 삶과 죽음은 모두 한 조각일 수 있다.

죽음은 관계의 단절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삶의 시작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도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같은 유언을 남기고 표연히 이승을 떠나갔다.

그의 유언은 마치 그가 살아있는 것처럼 남아 있는 사람들의 가슴속을 휘젓고 있다.

필생즉사(必生卽死)요, 필사즉생(必死卽生)이라고 했다.

위대한 자연 앞에서, 흐르는 역사 앞에서 삶과 죽음은 모두 한 조각일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살을 한 게 아니었다. 그는 한 조각에 불과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자기희생'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준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일까. 당연히 현직 대통령이다.

바둑에도 생불여사(生不如死)라는 게 있다. 두 집을 짓고 살았지만 전체 국면을 그르쳤을 때 쓰는 표현으로 아주 곤란한 처지에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법적으로는 대통령일지 몰라도 이번 일로 이미 도덕적인 측면에서의 대통령 이미지는 완전히 무너졌다. 검찰 책임이라고 할지 모르나 적어도 이번 일을 즐긴 것만큼은 부인하진 못할 것이다.

시인 이성복은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고 했다.

정적(政敵)을 향해 표출된 권력도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정문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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