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여름이면 지나가는 장마였지만 이상 기후로 인해 이제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머물고 있다. 과일은 당도가 떨어지고 채소 잎들은 더위에, 장마에 녹아내린다. 야속한 마음에 "비 좀 적당히 올 수는 없나. 누가 비 좀 말려줘 봐" 라고 한마디 했더니,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미실이 에게 한번 부탁해 보세요."라고 한다.

알고 보니 요즘 '선덕여왕' 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이 '미실'이란다. 신라 선덕여왕 대에 살았던 미실은, 일 년 동안의 절기의 변화 등을 적은 책력을 통해 민심을 얻고,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는 내용의 드라마다.

얼마 전 개봉된 '해운대'라는 영화가 7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 여름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 영화는 '쓰나미' 즉, 해일을 소재로 하고 있다. 2004년 12월,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공포의 쓰나미는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일대를 순식간에 휩쓸어 22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상최고의 재앙이었다.

물론 영화 '해운대' 에서 메가톤급의 쓰나미가 발생한다는 설정자체는 다행히도 허구이라서 우리가 갖는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만큼은 명확하다. 2004년 발생한 쓰나미도 분명, 인간의 어리석음과 오만함을 꾸짖는 대자연의 경고 일 것이다.

신라의 미실은 자연의 모든 재앙을 하늘이 내렸다고 했다면, 오늘날의 재앙은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일까. 다름 아닌 인간 스스로가 불러온 것이다. 어리석은 인간의 욕심으로 좀 더 편하고자, 땅위에 있는 것도 모자라 땅속에 있는 자원이 고갈되도록 쓰고, 좀더 잘 먹고 살고자, 자연의 질서를 무시하고 파괴한 우리에게 그 책임이 있을 것이다.

이제 오늘날의 미실의 책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구 온난화와 환경오염에 따른 지구의 기후는 이제 눈부신 과학으로도 정확한 예측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미실의 책력으로는 어림없다. 자연의 빛과 물의 힘을 빌려 짓는 농사는 더욱이 이렇게 변화하는 기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선덕여왕이 살던 시대로부터 1천3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농사를 하늘의 뜻에 맡긴다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과학의 발전들은 우리를 비웃을 것인가.

과학의 발전이 우주를 넘나들어도 인간이 먹고 사는 가장 기초적인 것은 쉽게 변화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이 좀더 흘러, 어떤 대체약품을 통해서 살아가는 시대가 도래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우리가 먹고 사는 식생활은 인간의 생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에는 틀림없다.

대자연의 경고를 겸허히 수용하여 우리의 반성의 시간을 좀더 앞당긴다면 어쩌면 미실의 책력은 다시 효력을 발휘할지 모른다.

아침부터 30도를 훌쩍 넘긴 날씨 탓에 줄곧 에어컨의 의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반성과 미실의 책력의 부활을 믿어보며 이제 에어컨을 끄고 더위 앞에 당당하게 서본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