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섭 / 논설위원
흔히 '씨 없는 수박'하면 우장춘 박사를 떠올린다.

그런데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은 우장춘 박사가 아니다. 그와 친분이 있었던 일본 교토대 기하라 히토시(木原均) 박사다. 히토시 박사는 우장춘 박사가 실험적으로 증명한 '종의 합성 이론'을 토대로 일본에서 최초로 씨 없는 수박을 만들었다

우장춘 박사는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동경대 농업과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농업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50년 한국으로 귀국해 국내에서 육종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가 되었고, 한국정부로부터 문화포상까지 받았다.

안타까운 이야기는 우장춘 박사 부친에 얽힌 사연이다.

1896년 대한제국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은 현역군인이 지휘하고 경찰이 동원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사건이었다.

당시 사건에 가담했던 조선군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 참령(지금의 소령계급)은 우장춘 박사의 부친이었다. 우범선 참령은 그 후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인 여자와 결혼해서 살다가 고영근(高永根) 에 의해 암살된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우장춘 박사는 한동안 방황의 세월을 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1950년 3월 어머니와 아내, 2남4녀의 자녀들을 남겨둔 채 아버님을 대신하여 조국에 속죄하기 위해 홀로 귀국길에 오른다.

21세기를 일컬어 '종자전쟁'의 시대라고도 한다.

그만큼 세계 각국들은 종자(種子)확보를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다.

선진국들은 수집·보존해온 종자의 이용 개발 및 지적재산권 쟁탈에 힘쓰고 있으며, 개발도상국들은 자국 종자에 대한 소유권과 배상에 나서고 있다.

기아(飢餓)와의 싸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된 종자전쟁이 이제는 우수품종을 육성하기 위한 기업 간의 전쟁을 넘어 유전자원 확보를 위한 국가 간의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가 이처럼 종자와의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정부는 아직도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우려 섞인 지적들이다.

"종자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종자 산업은 21세기 생명공학을 이끌어갈 미래의 첨단산업이다.

그러기에 많은 나라들이 이 분야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으며, 다국적 회사들도 종자 개발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육종(育種)은 재배식물이나 수목 등 생물의 품종을 개량하여 보다 사용가치가 높은 신종, 신품종을 육성하는 연구 분야다.

씨 없는 수박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우장춘 박사는 육종의 중요성을 새삼 깨우쳐주었다.

우장춘 박사와 부친에 얽힌 역사적 아이러니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그가 씨 없는 수박의 토대가 되는 '종의 합성 이론'을 처음에 발표하고도 씨 없는 수박을 먼저 만들지 못한 데에는 부친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방황한 세월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종자이론을 먼저 발표하고도 주변 여건이 도와주지 않으면 종자 개발이라는 최종 전쟁에서 실패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종의 합성 이론'을 먼저 발표하고도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하는데 선점을 빼앗긴 우장춘 박사의 사례는 역사적 교훈이 될 만한 사건이다.

종자 주권을 지키려면 정부도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러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지언정 방황하게 하는 환경적 요인을 제공하는 역사적 우(愚)를 더 이상 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장들은 특히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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