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선 / 교육평론가
진나라는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다. 법 집행은 가혹할 정도로 엄격했다. 그런데 법치에 의해 잘 굴러가야 할 국가가 16년만에 망했다. 무슨 이유일까? 가혹한 법치가 한 몫을 했다. 법에 대한 냉소주의를 키운 것, 법치이긴 하지만 무리한 법치가 역설적으로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교육현장인 학교에서도 이런 모습을 본다. 교칙만능주의가 오히려 교육을 망치는 역설을 불러온다. 결국 교사는 교육편의주의에 빠지게 되는, 학생은 학교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실제로 일부 교사들은 모든 문제를 교칙으로 해결하려한다. 마치 교칙을 만병통치약처럼 여긴다. 법치처럼 교칙도 지켜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인식이다. 이런 상황에서 끊임없이 상담하고 학생이 돌아서길 인내하는 교사는 무능한 교사가 된다. 본말전도(本末顚倒)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교칙만능을 부르짖는가? 한 마디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한 결과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언급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에 의하면 '확신의 정치'와 '책임의 정치'를 구분해야 한다. 전자(前者)는 '원칙에 살고 원칙에 죽는 것'을 말한다. 요즘말로 하면 무조건 법대로다. 그들에게 법은 '목적' 그 자체로 존재한다.

반면, 후자(後者)는 '결과'를 중시한다. 이들에게 법은 수단일 뿐 필요하면 비켜가거나 고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차이다 교칙만능을 부르짖는 교사들은 교칙이 교육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란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교육에서 변화에 대한 긍정적 기대를 빼면 의미가 없다. 이것이 교육의 특수성이다. 학생들은 변화의 가능성이 큰 미성년자들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교육이 학생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끄는 활동이라고 한다면 교칙이 어떤 의미로 적용되어야 하는지는 자명하다.

또 다른 면에서, 교칙만능주의는 과거 나치즘과 같은 '형식적 법치'나 다름없다. 참고지만, 히틀러는 1933년 독일 제국의회 의사당 방화사건으로 네덜란드 공산주의자가 체포되자 이를 계기로 대통령에게 비상통치권을 요구한다. 이로써 법률을 도구로 한 형식적 불법지배를 정당화시킨다. 이것이 형식적 법치의 시발점이다. 이후 나치즘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다 아는 바와 같다.

다시 본론으로 와서, 염려는 이런 것이다. 교칙만능주의에 의해 학생들을 밀어내는데 열중하는 것은 '교칙에 의한 극단적 지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교육에서 교칙이 형식이 아닌 실질적 법치의 관점에서 적용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교육은 학생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설득과 이해는 필수요소다. 이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교육이 될 수도, 비교육이 될 수도 있다.

필자가 항상 주장하듯 문제가 있다고 해서 모두 처벌위주로 간다면 그건 교육의 부정이다. 물론 법이든 교칙이든 지켜야 한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단순히 지킨다를 넘어 적극적으로 바람직한 것을 추구하는 행위도 포괄하게 된다는 점이다. 적어도 교육에선 이런 부분들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법가사상을 완성한 한비자의 한 마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얻고, 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를 이룬다"는 것, 교사가 교칙만을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면 교육을 할 수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교육현장에는 교칙부터 들이대는 교사들이 많다. 어리석은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그래서 망언다사(妄言多謝)지만 제목도 <어리석거나 모르거나>로 달았다.

기억하겠지만, 이 글은 지난 9월 28일자 본 난에서 왜 교칙만능이 위험한지를 쓰기로 한 한병선의 약속 글이다. 교육을 교칙에만 기대 기계적으로 해결하려는 교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오늘의 충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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