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중 청원 남이초 교장, 소설가

▲ 최창중 청원 남이초 교장, 소설가
익히 알려져 있는 대로 시인 김지하는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권력 상층부의 부정과 부패상을 판소리 가락으로 담아낸 담시 '오적'을 발표하여 단숨에 박정희 시대의 '뜨거운 상징'으로 떠올랐다.

이후, 천주교 원주교구를 중심으로 저항운동에 전념하면서 연행과 석방, 도피생활을 거듭하던 중, 1974년 4월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주일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75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 무렵, 대하소설 '토지'를 지은, 김지하 시인의 장모인 박경리 선생은 사위라면 치를 떨었다. 내란 선동죄 등으로 사형이 선고됐던 김지하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것은 1975년 2월 15일 오후 9시쯤 영등포교도소 앞이었다.

그날 김지하를 기다리는 수많은 환영 인파 속에는 장모인 박경리 선생도 있었다. 선생은 10개월 된 김지하의 아들 '원보'를 업고 있었다. 그러나 김지하는 장모를 못 본 채 그냥 지나쳤다. 목말을 탄 김지하는 우쭐해져 '우린 승리하리라!'를 목청껏 부르며 명동성당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듬해, 김지하는 다시 구속됐고, 박경리 선생은 외손자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손수 업어서 키웠다.

무남독녀 외동딸의 남편인데 감옥을 들락거리니 장모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아무리 민주화를 위해서라지만, 그것도 남의 얘기지 막상 내 가족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너그럽게 받아들일 부모는 없다. 살림살이조차 곤궁한 형편인데 외손자까지 업어 키우려니 말을 안 해 그렇지 얼마나 속이 썩었겠는가? 사위는 자기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장모가 야속했을 테지만 장모는 가족을 챙기지 않은 채 감옥을 들락거리는 사위가 못마땅한 것은 물론 때려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박경리 선생은 사위를 김 서방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지하'라는 이름으로 부르거나 잘해야 '원보 아비' 정도로 불렀다.

교보문고에서 발간하는 '대산문화'의 2009년 가을호에 시인 김지하에 대한 대담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에서 임동확 시인이 기술한 내용을 대충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시인 김지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에게 우호적이든 비우호적이든 그가 어떤 인물인지 정도는 안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과연 김지하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물으면 제대로 알고 있는 이들을 만나기 어렵다.

좌익에선 배신자라고 비판 받고, 우익에선 빨갱이라고 비판 받고, 중간파에게는 찍어 죽일 놈이라고 비판 받는 요즘의 그를 만나면 좌우 양극단을 버리되 중간도 아니고, 전체적인 차원 변화의 진정한 중도(中道)에 서려는 그의 삶이나 사상적인 태도를 접하게 된다.

주변의 평가는 좌파도, 우파도, 중간파도 아닌 그의 독창적인 행보를 두고 퍼붓는 반감이나 외면으로 보인다. 김지하는 그렇듯 좌파냐, 우파냐, 아니면 중간파냐 하는 조악한 기호론적 게임이나 허구적 신화를 넘어 서 있다. 촛불 집회를 전후로 이른바 좌파와 우파 그리고 중간파에 대해 퍼부었던 그의 엄혹한 비판이 이를 웅변한다.'

위의 글을 읽자, 언젠가 그가 TV에 출연했을 때 대담자가 과거와 같은 과감성을 주문하자 웃으면서 뇌까렸다는 말이 떠올랐다.

"저도 이제 자손을 생각해야 할 나이입니다. 젊은 시절처럼 행동해 자손으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안 되겠지요."

비록 박경리 선생에게는 불효를 했지만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엔 그도 어쩔 수 없이 한국의 어버이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지하에 계신 박경리 선생은 빙그레 미소 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시인 김지하를 두고 이념적으로 어느 편에 서 있는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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