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실마리를 잡은 것은 실성한 노인의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내 인생에 바람처럼 다가왔다 바람처럼 사라져가 이제는 이름마저도 가물가물한 많은 스승들 가운데 송곳으로 후벼 파듯 내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겨 주어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름은 물론이요 외양까지 또렷하게 기억되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의 국어 선생이 분명했다.

남녀 공학이었던 모교의 여학생반 담임이었던 그는 국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쌍꺼풀진 눈에 부리부리한 눈매를 가진 호남형의 얼굴이었다. 외모 탓인지 국어 선생과 관련된 소문이 줄을 이었는데 주로 여학생들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얼굴이 반반한 아이들만 골라 주말이면 함께 등산을 다닌다는 이야기도 떠돌았고, 가정 방문을 구실로 밤을 택하여 자취를 하는 여학생들의 집을 순례하며 흑심을 드러낸다는 소문도 떠돌았고, 매주 몇 여학생을 자신의 하숙집으로 불러들여 속옷까지 세탁시킨다는 소문 또한 떠돌았다.

그가 내게 치명적인 치부를 드러낸 장면은 현대문학을 공부하던 중에 일어났다. 어떤 내용을 배우던 중이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수업을 진행하던 그가 '문학평론가'라는 직업을 거론했다.

고등학교 학생이었기에 문학평론가라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 부류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다가서는 것이 없어 나는 서슴없이 질문했다.

"선생님, 문학평론가는 무엇을 해서 먹고삽니까?"

항상 더러운 소문을 달고 다니는 그였기에 부지부식간에 조금 시건방진 말투로 질문이 나갔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는 교사라면 친절하게 설명을 달아야 할 직분을 망각한 채 댓바람에 이쪽을 사정없이 깔아뭉갰다.

"네깟 놈이 그런 것까지 걱정할 필요 없어. 모두 잘 먹고 잘 사니까."

오만하고 방자하게 내리쳐진 국어 선생의 언어폭력에 정통으로 정수리를 얻어맞은 나는 너무도 작고 연약한 내 존재의 의미를 곱씹으며 울화를 부글부글 끓였고, 친구들은 까르르 웃었다.

국어 선생의 그 표독스런 질책은 그래도 공부 깨나 한다고 행세하던 내 자존심을 날카로운 끌로 후벼 판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 일은, 이후 나로 하여금 국어 선생을 벌레 보듯 하게 만들었다. 국어 시간만 다가오면 나는 그를 곤경에 몰아넣을 질문을 철저한 사전 연구 끝에 몇 가지씩 마련했다.

견고해 보이는 바위도 한번 흠집이 나면 쉽게 부서지는 법. 제법 단단한 실력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옥니 문 제자의 계획된 음모에 간단없이 흔들렸다. 그는 질문이 쏟아질 때마다 표독스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답변의 기회를 다음 시간으로 미루곤 했다.

그렇게 나는, 남의 멸시를 멸시함으로써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던 시지프스처럼, 국어 선생을 궁지에 몰아넣음으로써 내 자신을 일으키고자 안간힘을 썼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꼴사납게 의붓자식이 더 출세한다고, 지방 일간지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그는 분명 교육자적 자질이 의심되는 선생인데도 승승장구해서 어느 중학교의 교감으로 승진 발령을 받는가 싶더니 이내 어느 중소 도시의 여고 교장으로까지 진출을 했었다.

그랬던 것이 몇 년 전이었는데, 어느 사이 저 지경이 되어 내 앞에 추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위에 적은 것은 필자의 단편소설 '착각(錯覺)'의 한 부분입니다. 문득 스승의 어려움이 상기되어 소개해 보았습니다. '문장궤범'에 나오는 다음의 글도 음미해 볼만하여 덧붙입니다.



'스승의 본분은 도(道)를 전하는데 있다. 하여, 도를 터득한 사람이 있다면 그곳에는 스승도 있는 셈이다.'

/최창중 청원 남이초 교장·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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