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哈爾濱) 역 의거 100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신문과 방송에서는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와 사학계의 도움을 받아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업적 및 안중근 의사 관련 새로운 사료 발굴 성과에 대한 특집을 마련해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일 당일에는 정부 또는 민간 차원에서 서울과 중국 하얼빈 현지에서 다채로운 기념식을 올려 안중근 의사의 유지와 업적을 기린 바 있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항해도 해주시 광석동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승마, 궁술, 사격술을 익혀 문무(文武)를 겸했다.

그는 1908년에는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군사령관 직책을 맡아 엄인섭과 함께 의병군을 이끌고 경흥까지 쳐들어갔으나 일본군에 패배해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로 가서 국민회와 일심회등을 조직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1909년 3월에는 노브키에프스크에서 김기룡, 엄인섭, 황병길등 12명이 모여 단지회를 조직했는데, 안중근과 엄인섭은 이토 히로부미를, 김태훈은 이완용을 각각 암살 제거하기로 단지의 피로써 맹세했다.

거사 당일인 1909년 10월 26일 아침에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일본 정관계와 군의 핵심고위직들로 구성된 공식 수행원 10여 명이 탄 열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하자 신문기자로 위장하고 플랫폼으로 걸어서 들어갔다. 안중근 의사는 환영인파 속으로 은밀히 파고들어 러시아 의장대 뒤에 자리를 잡고 나서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려 플랫폼에 나타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인 코코프체프와 열차회담을 마치고 플랫폼으로 내려섰을때 안중근 의사는 가슴속 깊이 숨겨둔 7연발 권총을 재빨리 빼들고 대한의군 참모중장(특파독립대장)의 신분으로 당당하게 그를 정조준해 모두 6발의 총알을 발사했다.

안중근 의사의 저격은 정확해 3발의 총탄이 이토 히로부미를 명중시켰다. 6발의 총탄 중 한발은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에 박혔고, 나머지 2발은 가슴과 복부를 관통했으며, 나머지 3발은 이토의 공식 수행원 3명에게 명중했다.

안중근의 의거는 이토 히로부미 한 사람에 대한 저격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부당성을 전세계에 폭로한 항일독립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거사 직후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때 안중근 의사는 저항하지 않고 권총을 플랫폼 바닥에 내던지고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라고 세차레나 우렁차게 외침으로써 우리 2000만 한민족의 기개와 강력한 항일독립의지를 세계 만방에 떨쳐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해방 후 당국의 무관심으로 인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역 의거 현장엔 안내 푯말조차 세워져 있지 않아 그곳을 찾는 동포들의 마음을 서글프게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묘소 찾기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아직까지 그의 시신마저 찾지 못하여 효창공원에 가묘를 써놓았다고 하니, 정말로 안타까운 마음 이루 다 형언할 길이 없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울린 6발의 총성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의거의 신호탄이었을 뿐만아니라 그의 평화와 평등사상인 '동양평화론'을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실제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역 의거는 일제시대에 애국지사들이 항일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는데 영향을 주었고, 1911년에 무창에서 일어난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인 신해혁명(辛亥革命)에도 영향을 끼쳐, 한·중 독립운동을 연결시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큰 것으로 사료되고 있다. 신상구 /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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