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범(수필가. 내토중 교장)

"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메모에 집착하기 시작해 이제는 잠시라도 메모를 버리고는 살 수 없는 메모광(狂)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버릇이 차차 심해 감에 따라, 나는 내 기억력까지를 의심할 만큼 뇌수의 일부분을 메모지로 가득 찬 포켓으로 만든 듯한 느낌이 든다.

요컨대, 내 메모는 내 물심 양면(物心兩面)의 전진하는 발자취며, 소멸해 가는 전 생애의 설계도이다. 여기엔 기록되지 않는 어구(語句)의 종류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광범위한 것이니, 말하자면 내 메모는 나를 위주로 한 보잘 것 없는 인생 생활의 축도(縮圖)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글은 이하윤 님의 수필 <메모광>의 일부이다. 얼마전 오랜만에 집을 정리하려고 책장을 정리하면서 먼지가 두툼하게 쌓인 그것도 모자라 색이 누렇게 바랜 중3 교과서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읽고 또 읽어 보았다.

학생들을 지도할 때 얼마나 강조한 내용인지 붉은 색으로 밑줄 그은 부분이 많음을 보고 지난날의 수업장면이 나도 모르게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치곤 간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정보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정보 홍수 속에서 남보다 앞서려면 두뇌를 기억하고 저장하는 기능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나아가 상상하고 창조하는 기능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지식사회에서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일의 승패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언젠가 기자가 집 전화번호를 묻자, 아인슈타인이 수첩을 꺼내 자신의 집 전화번호를 찾았다고 한다. 기자가 깜짝 놀라서 "설마 댁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시죠?"라고 물었더니, 아인슈타인은 "전화번호 같은 건 기억하지 않습니다.

적어두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걸 무엇 때문에 머릿속에 기억해야 합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처럼 아인슈타인은 기억은 메모에 의존하고, 두뇌를 창의적으로 생각하는데 쓰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처럼 우리가 늘 사용하는 메모에는 특별히 정해진 형식은 없다. 메모는 자신을 위한 것이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렵고 딱딱하게 생각하지 말고 방금 떠오른 싱싱한 아이디어가 달아나기 전에 얼른 낚아채서 스케치 하듯이 기록하면 된다.

문제는 메모가 그냥 적당히 끄적이는 수준이 아니라 메모에 대한 자신만의 원칙과 메모를 한 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라고 하는 자신만의 메모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보통 사람들은 탁상용 달력에 그날그날의 약속이나 미팅일정을 적어 놓고 일정 관리하는 정도로 그치고 마는데, 내가 아는 어떤 지인은 그날의 메모를 꼭 '복습'했다고 한다. 하루를 마감하면서 그날 만난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대화 내용, 미심쩍은 점, 어떤 영향이 있을지, 새롭게 깨달은 사실 등을 다시 메모해 두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인의 메모는 단순한 '기억 보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반성'과 '내적 성장'을 위해 메모를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분에 비하면 나 자신은 얼마나 메모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실천해 왔는가? 다시한번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얻게 되니 감사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지속적인 자기암시와 노력을 통해 꿈을 이룰 수도 있고 비록 완벽하진 못하더라도 그 목표에 근접한 상태까지는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방법 중에 가장 훌륭한 방법의 하나가 바로 메모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부터라도 자신에 맞는 메모에 대한 뚜렷한 철학을 가지고 반추해보는 습관을 가진다면 우리에게 허락된 인생을 조금은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음은 물론 나아가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 질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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