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우 충북도 교육위원

무대 앞에 사람들이 모여앉아 공연을 보고 있다. 그러다 그 중 한 사람이 자기만 더 잘 보겠다고 일어선다면 어떻게 될까. 주위에 하나둘 그렇게 하는 사람이 늘면서 뒤에서는 더는 앉아서는 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끝내는 모든 관객이 일어나 서로 '까치발경쟁'을 해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상황에서 모든 이에게 바람직한 길은 무엇일까. 당연히 모두가 편히 앉아서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질서를 만드는 일은 불가능할까?

이것을 사교육에 대입해 보자. 서로 뒤질세라 매달리는 사교육의 끝은 어딘가. 공부는 할수록 좋고 교육도 받을수록 좋은 것일까. 그렇다면 사교육 기승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사교육 광풍을 반기는 이는 없다. 가정적으로도 버거운 출혈이고 국가적으로도 엄청난 비효율이다. 그럼에도 쉬 떨치지도 못한다. 이 딜레마를 어찌해야 하나.

다시 앞의 공연상황과 견주어 보자. 편안한 관람질서가 깨지고 경쟁이 유발된 것은 맨 처음 일어선 사람 때문이었다. 그것이 곧장 모두가 일어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은 질서를 지키는 사람만 바보가 되는 듯해서였다. (종내는 모두가 바보가 되고 말았지만!)

사교육도 그렇다. 사교육의 필요를 먼저 느낀 이가 있을 수 있다. 공교육이 부실해 성에 차지 않거나, 공교육 만족도와 상관없이 남보다 앞서고 싶어서도 그럴 수가 있다.

그런데 일단 누군가 사교육에 기대기 시작하면 같이 경쟁하는 입장에서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불안과 피해의식이 심한 이로부터 하나둘 그 대열로 뛰어들기 시작해, 결국은 모두가 그 회오리에 휘말려든다.

사교육의 효과 여부는 둘째고, 신경 쓰이는 것은 남들이 하느냐 마느냐다. 남들이 다 하는데 혼자만 하지 않고 버티다가는 자기만 바보가 되고 말 것 같다. 그러느니 차라리 같이 바보가 되는 길을 택한다. 영락없는 '죄수의 딜레마' 그대로다.

다시 앞의 공연으로 돌아가 보자. 모두가 편안하게 볼 상황은 어떻게 가능한가. 좋은 답은 관객들의 지혜에 있다. 관람경쟁은 아무에게도 유익하지 않으며, 제 욕심을 버리는 것이 도리어 이익이 됨을 알아차리는 지혜! 그리고 나쁜 답은 '관람 중 일어서지 않기'를 약속하고 그 이행을 단속하는 것이다.

이를 사교육에 적용해보면 어떤가. 좋은 답은 사교육 수요자들이 그 딜레마의 한계와 본질을 깨닫고 자제하는 것이고, 나쁜 답은 금지령이나 관련법으로 통제하고 단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법들도 사교육의 근본처방은 될 수가 없다. 사교육은 '학벌사회'라는 고질적인 사회구조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벌이 신분과 지위를 가름하고 '대학서열화'가 그것을 강화하는 구조가 엄존하는 한, 남보다 앞서야 산다는 경쟁강박증과 그에 따른 사교육 유혹을 떨치기는 불가능하다.

사교육 광풍도 일종의 팬덤(fandom)현상이다. 공연에서 스타가 등장하면 광팬들의 관람질서가 일거에 무너지듯, 학벌경쟁 앞에서는 다들 맹목이 된다.

해법은 거기서 찾아야 한다. 우리도 서구나 북유럽 나라들처럼 대학서열을 허물고 평준화하는 것이다. 그랬다간 '하향'평준화 되지 않겠느냐는 반론도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근거 없는 선동이다. 그런 나라 대학들의 경쟁력은 우리보다 훨씬 높기만 하다.

사교육해소를 위한 공교육강화 방안도, 교육투자의 획기적 확대(GDP대비 7%확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교육을 국가가 책임지는 '북유럽형 교육복지'로 나아가는 것만이 답이다.

얼마 전 어떤 강연 기회에, 어린 학생에게 사교육 해법을 물었다가 얼굴이 화끈해진 적이 있었다. "학원 안 가도 되게 해 주심 되죠? 학원비 대신 내 주시든가요!" 아이의 항변 속에 바로 정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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