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복 시인

찬바람이 스산하게 불면 짙푸르던 나뭇잎이 윤기를 잃어가면서 산야는 점점 노랗게, 빨갛게, 단풍이 들고 귀뚜라미 애절한 가을 쏘나타에 싸늘한 달빛이 스쳐 가면 출렁이는 흰 갈대밭, 황금색 들판으로 철새 떼 날아드는 가을이 온다.

가을은 등하가친의 계절이요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풍요로운 계절로 각 지자체마다 그 지방의 특산물 이름을 따서 주민들과 함께하는 축제행사를 하느라고 전국이 떠들썩하다.

학교는 가을 소풍에다 대운동회로 어린이부터 어른들까지 풍요를 만끽하면서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축제의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축제인 행사장에는 어느 곳을 가나 가을의 대명사인 국화로 황금색 물결을 이루며 그윽한 국화 향을 맡으면서 볼거리 먹을거리를 즐기면서 참여하게 된다.

국화는 크게 소국과 대국으로 분류 되는데 소국인 혜인이나 마미쿳션은 대국인 채관과 쿠판종, 강관 보다 향기가 짙다.

국화의 종류가 많듯이 국화를 감상하는 사람마다 선호도도 제 가각 다르다 실국인 채관은 가냘픈 여인의 머릿결과 같고 강관은 우아한 공주의 머릿결과 같으며 백학령은 백학이 날개를 활짝 편 듯 우아한 자태에 도취된다.

식도락가들은 국화 향에 매료되어 소국을 누룩과 더불어 발효시킨 국화주를 주조하여 겨울 내내 국화 향을 음미하며 친지와 함께 정사나 세상사를 논한다.

여인들의 국화사랑은 잠자리에서도 이어져 소국을 그늘진 음달에 말리어 베갯속을 하면 두통이 사라질 뿐 아니라 숙면을 하여 자고난 뒤 정신이 맑아진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국화 감상법을 여름에는 검푸른 잎새를 감상하며 가을에는 꽃과 향을 음미하며 낮에는 자태를 보고 밤에는 그림자를 감상 한다고 하듯이 사군자 중에 하나인 국화를 통한 가을을 즐겨본다.

우리 인간이 느끼고 보고 듣고 맛보는 것 중에 실체가 아닌 것들 중에 상기에서 언급한 가을향인 국화향이 있는가하면 가을에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이 있다.

추수철이면 농촌마다 들리는 탈곡기 소리, 참새 떼를 쫒는 깡통 치는 소리, 철새가 밤하늘을 수놓으며 날아드는 소리가 있지만 필자의 머리에 각인되어있는 가을밤의 소리는 트럼펫 연주 소리다.

중학교 때 밤늦게 희미한 백열등 아래서 공부하다 듣던 트럼펫으로 연주하는 밤하늘의 브루스 소리를 고희가 된 지금도 잊지 못하고 고적한 밤이면 이명(耳鳴)과 함께 들리는 밤하늘의 트럼펫을 감상한다.

시골농촌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행사로는 반드시 유일무이한 소방대 악대가 연주하며 시가를 행진하는데 행진곡 소리에 끌리어 행사가 마칠 때까지 악대를 따라다니며 감상과 관찰을 하곤 했다.

맨 앞에서 악대장이 멋진 유니폼을 입고 지휘봉에 따라 연주하는 장면은 어린 시절 나에게는 큰 감명이자 관심사였다. 맨 앞줄에는 클라리넷, 풀릇(flute),이 다음엔 색스폰, 트럼펫, 호른, 트럼본, 실로폰, 그 다음에 타악기인 소북과 대북 맨 뒤에 스자폰(튜봐)로 웅장한 행진곡은 누구나 어깨가 들먹거리기에 충분했다.

그들 중 키가 작고 머리는 스포츠형으로 깍은 트럼펫 연주자인 박아무게 씨는 내가 아는 여자 동창생 아버지로 직업은 쌀장사를 하셨는데 어데서 그토록 훌륭한 트럼펫 연주를 배우셨는지 알 길은 없다.

그분은 별이 총총히 빛나는 가을밤에 이따금씩 소방대 오층 전망대에서 밤하늘의 트럼펫을 독주로 부는데 그 소리는 훗날 대학시절에 흑백영화로 보았던 '지상에서 영원으로'라는 영화에서 친구인 프랑크 시나트라가 죽자 몽고메리 크리푸트가 눈물을 흘리면서 연주하는 장면과 연상이 되면서 더욱 깊이 빠지게 된다.

지금도 나에게는 그 소리가 그윽한 음률에 별빛과 함께 도취되어 차가운 달빛과 함께 지우고 싶은 쓰라린 과거를 고독한 창가에 흘려보내며 흐느끼는 듯한 음률에 다시 한 번 도취 되고 싶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