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아주 오랜 역사는 알 수 없으나, 청주 읍지에 의하면 백제때에는 상당현(上黨縣) 낭비성(狼臂城) 낭자곡(狼子谷) 신라 때에는 서원소경(西原小京) 서원경으로 호칭하였다가 고려 태조23년에 청주목(淸州牧)을 설치, 비로소 청주라 호칭하기 시작해 조선 대한제국과 왜정(倭政) 대한광복에 이르기까지 장장1100년 간 청주목, 청주군, 청주읍, 청주부, 청주시 등으로 청주(淸州)라고 호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주가 더 발전하지 못한 이유

그러나 대부분의 도시는 당초의 명칭으로 복원되었으나 청주·청원은 지난 두 번의 통합기회를 청원군민의 다수 반대로 놓치고 말았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통합해 영원한 청주, 웅대한 청주시로 발전되기를 기원하며 그동안 청주가 왜 더 발전하지 못했나 열거해 보기로 한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왜정초기 경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이어지는 철도망을 시설할 때 남쪽으로 수원 평택 목천 청주 대전 대구 부산에 이르는 철도의 설계를 마치고 사유지가 가장 많이 편입되는 목천 현감(縣監)을 방문, 토지 승낙을 청하니 땅을 거저 뺏는 줄 안 현감 왈 "안된다, 이놈들! 양반골에 철마(鐵馬)가 왠말이냐?"고 강경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자 부득이 노선을 연기로 돌려 조치원에 역을 세우고 차후 청주, 충주를 연결하는 충북선 철도를 설치하고 청주역사를 현 시청 앞 네거리부근에 설치했다. 그러다가 철도의 곡선을 바로잡기 위해 우암동 전 MBC자리로 옮기고 10여년 만에 또 오동동으로 역사를 옮기기 위해 부지매입을 마치고 역사건축공사를 시작하다가 갑자기 중지를 하고 정봉리로 옮기게 되었다.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전국 대도시 중심에 철도역사 없는 곳이 어디 있는가?

1960년대 후반 국토의 난개발을 막고 쾌적한 도시를 보호한다는 그린벨트 설치 당시 대전서는 중심에서 백리(百里)가 넘는 주위까지 컴퍼스를 돌리며 그리느라 청원군 부용면, 현도면 일부와 옥천군 군북면 일부까지 침범했다. 그런데 청주는 어찌하였나? 주위 8Km 둘레를 돼지우리도 마음대로 짓지 못하도록 30여년간 묶어 놓았으니 주민들의 고통과 재산 손실이 부지기수였다.

1970년대 청주 출신인 예비역 육군대장께서 국회 국방위원장을 지냈는데 자기들의 낙향선조 묘소와 열선조를 모신 대종산(大宗山)과 자기성씨들의 집성촌을 파괴해 비행장을 닦도록 보고만 있었던 것인가? 좀 더 좋은 장소를 물색해 보라고 정부 당국자와 국회 국방위원들에게 종용 했더라면 다른 곳으로 변경될 수 있었을 것이다.

#통합해 청주가 대도시로 발전하기를.

우리 청주를 계란에 비유한다면 현 청주시는 노른자요 외관 현 청원은 흰자와 같다. 그래서 먼 옛날부터 하나의 생활권역이요, 하나의 행정권역으로 묶었던 것이다.

뭉치면 힘이 배가 되고, 흩어지면 힘이 미약해진다. 인접한 대전을 보라. 대덕군을 통합하여 웅장한 도시로 광역시가 되었다. 지난 번 통합찬반 투표 때 통합이 되면 혐오시설인 화장장, 쓰레기장만 받게 된다는 청원의 몇몇 분들의 선동에 의해 실패했으나 다 알다시피 화장장, 쓰레기 소각장은 청주에 설치돼 가동하고 있으며 청주시에서 매입하였던 미원면 임야도 매각 처분했다. 앞으로 어떤 좋은 기구나 기관을 설치하려면 시내 지역은 할 곳이 없어 자연히 외곽지역으로 가야할 것이다.

통합과 동시에 동서남북으로 구(區)가 증설된다고 하니 자연히 각종 기관이 증설되고 일자리도 늘어나며 우수한 인재들의 출세 길도 많아 질 것이다. 광복 후 잠정적으로 붙여졌던 청원 명칭을 잃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 말고 원래의 천년고도(千年古都) 맑은 고을 청주(淸州)라는 명칭으로 복원 된다고 너그럽게 생각해 한마음 한뜻으로 통합해 우리들의 청주(淸州)가 대도시로 발전하기를 바라며..

/이영복 대한 노인회 청주시지회 오근장동 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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