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 법무법인 '청남' 대표변호사

최용현 법무법인 '청남' 대표변호사

중앙일보 12월 4일자 1면 톱기사의 제목은 '파업으로 열차 멈춘 그날, 어느 고교생 꿈도 멈췄다', '부모의 한탄, 자가용도 못 태워준 못 가진 부모가 죄인'이다. 서울대에 면접을 보러 가던 한 고교생이 철도노조의 파업으로 열차가 지연돼 면접을 보지 못해 서울대 진학을 못하게 됐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소개하면서 부모와 해당 고교의 교장의 입을 빌려 철도노조의 파업을 은근히 비난하고 있다.

시시콜콜 따지는 네티즌을 의식해서인지, 안타까움을 배가시키려는 의도인지 해당고교생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국립대를 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고, 이미 다른 명문 사립대의 특별전형도 통과한 상태로 서울대에 충분히 합격할 만한 수재였음을 깔아두는 세심한 배려까지 잊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철도노조는 이 기사가 실리기 전날 파업을 철회해 기사가 다소 김이 빠지긴 했지만, 역시나 필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위 기사는 다른 주류 신문에도 인용되는 영광이 뒤따랐다. 또한 철도노조는 가난한 고교생의 꿈마저 짓밟은 범죄자가 되는 덤까지 얻었으니 기자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셈이다.

안타까운 사연인데,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물론 해당 고교생, 부모에게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 철도노조파업자들에게 그 책임을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위 기사는 기자 자신의 정치정향을 아주 우연하고 안타까운 사연에 끼워맞춰 우리에게 은유하고 있다. 정당한 노동운동마저 불법행위로 은유함은 물론 사회적 범죄행위, 도덕적 파렴치범으로까지 은유하고 있다. 이것이 필자의 괜한 의심일까?

그날 같은 신문의 다른 란에는 "법과 원칙을 내세운 정부의 대응과 불편을 참은 시민의 힘이 파업철회를 이끌어 낸 것으로 풀이된다", "철도노조의 파업철회는 시민과 정부에 대한 백기투항이다, 정부는 예전 정부와 달리 흔들리지 않았다… 시민과 정부는 2인3각 경기를 하듯 한뜻으로 움직였다"라는 내용과 함께 법무부, 경찰청, 국방부, 코레일 등 승자들을 열거하면서 이들의 기민하고 적절한 대응으로 철도노조가 파업 8일만에 백기를 드는 성공을 얻은 양 묘사한 기사가 2편 더 실려 있었다. 가만히 있는 시민까지 정부의 협조자로 위대한 승자의 한편인양 끌어들이고 있다.

기사대로라면 법과 원칙은 정부에 있고, 파업을 한 노조에는 불법과 이기적 목적밖에 없다. 시민은 정부의 편이고, 노조는 반시민적이고 시민의 적이다. 두 편의 기사를 쓴 기자는 안타까운 고교생 사연을 쓴 그 기자. 이 정도면 기자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렇듯 기막히고 안타까운 사연, 취재대상의 입을 통한 생생한 현장 등으로 포장되었지만 결국은 언론사 사주나 데스크의 정치정향에 맞게 오묘하게 뒤틀린 그래서 그 해답을 찾기 어려운 기사를 우리는 거의 매일 본다. 19세기의 언론은 절대권력으로부터 탄압받으며 사회정의를 밝히는 횃불이었으나, 21세기의 언론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회여론을 유인하고 반대여론을 억압하고 정책의 방향을 유도하는 권력자임은 이미 여러 학자들이 한탄하고 있는 바이니 이같은 기사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필자의 예상으로는 조만간 겉으로는 법과 원칙의 승리라는 미명하에 속으로는 이번 기회에 다른 노조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려는 의도하에 익명의 대학교수나 일반시민의 입을 빌려, 백기투항한 철도노조원들에 대한 검찰·경찰의 엄정한 구속수사와 노조원의 가족마저 길거리로 내모는 개인적 손해배상청구의 지속을 촉구하는 기사가 나올 것이다.

과연 고교생의 안타까운 사연을 쓴 기자가 노동복지 향상을 위해 파업을 하다가 구속된 노조원이나 그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을 기사로 쓸까 의심된다. 어찌됐든 서울대에 합격하지 못한 고교생도, 백기투항한 노조원과 그 가족도 모두가 안타깝다. 심지어 가만히 있다가 어느새 정부의 편이 된 시민도 안타깝다.

/ 최용현 법무법인 '청남' 대표변호사 choiyh6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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