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선 / 교육평론가

경인(庚寅)년이다. '호시우행(虎視牛行)', '호시우보(虎視牛步)'란 말이 먼저 떠오른다. 경인년 호랑이의 상징과 잘 맞아 떨어진다. 호랑이처럼 예리하게 판단하고 소걸음처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호시우행이든, 호시우보든 올해 교육계도 이런 행보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지난 일년에 대한 여러 가지 반성적 측면에서다.

첫째, 백년대계다.

그 동안 교육에 대한 정책적 접근은 백년대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백년은 커녕 십년조차 내다보지 못했다. 심지어 1~2년을 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도 교육 이야기만 나오면 백년대계란 말이 어김없이 나온다. 관중(管仲)이 무덤 속에서도 웃을 일이다. 백년대계란 말은 관중의 저서 '관자'(管子)에서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십년수목백년수인(十年樹木百年樹人)', 나무는 10년을 내다보고 심지만, 사람은 100년 앞을 보며 심는다는 것. 올해는 모든 교육문제가 진정한 백년대계의 바탕위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둘째, 균형이다.

특히 교사들의 균형 감각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중용(中庸)적 태도다. 자사(子思)에 의하면, 중용의 원리는 온 우주에 가득 차있고 세상의 가장 작은 것들에도 숨겨져 있다. 중용의 오묘함은 끝이 없으며 그것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쓰여지는 실질적인 학문이다. 또 '치우치지 않고 기대지 않아,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어 평상의 도리(不偏不 無過不及 而平常之理)'라고 정의했다. 모든 인간생활의 지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용의 핵심은 단순한 중간(中間)이 아니다. 기계적인, 혹은 물리적인 가운데도 아니다. 사람과 사람, 또는 사람과 사물 사이의 생기는 문제에 있어 누구에게나 가장 알맞은 도리가 바로 중(中)이란 것이다. 그렇다고 중을 무사안일이나 소극적인 처세관쯤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중(中)은 천하의 정도(正道)요, 용(庸)은 천하의 정해진 이치, 즉 정리(定理)가 되기 때문이다.

중용은 정도이므로 부정(不正)에 대한 저항을 뜻한다. 또 정리이므로 비(非)정리에 대한 거부의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중용은 일상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므로 순간적인 진리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우주의 근본이 되는 영원무궁한 진리다. 중용의 도(道)는 가장 평범한 듯 하면서도 상당한 덕의 수양이 있어야만 바르게 행할 수 있다. 어쨌든 중용은 일상과 분리시키기 어렵다는 것.

이를 그대로 교육현장으로 옮기면 곧 균형 감각이 된다. 바로 이런 것이다. 만일 교사들이 균형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교육을 잃게 되고, 교육을 잃으면 아이들의 미래를 잃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렇다. 분출하는 문제와 사건의 만화경 속에서 교사들이 균형감각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해보라. 극단에 치우쳐 학생들을 지도한다고 생각해보라. 스스로에 대한 성찰대신 특정 이데올로기에 집착한다고 생각해보라. 교육이 제대로 되겠는가.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이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셋째, 모든 교육주체들은 소통해야 한다.

그래서 소통과 균형의 협주곡을 만들어야 한다. 소통하지 않으면 막혀버린 '밀운불우(密雲不雨)'가 된다. 더욱 쌓이게 되면 터지기 일보직전의 '첩첩밀운(疊疊密雲)'의 상태가 된다. 이 경우 비가 쏟아지면 걷잡을 수 없다. 결국에는 둑이 터지고 범람하게 된다. 왜 소통해야 하는지에 대한 간단한 이유다.

문제의 모든 이면에는 불통(不通)이 원인이다. 올해도 교육계에는 산적한 현안들이 많다. 교원평가도 그렇고, 사교육 문제도 그렇고, 교육자치 문제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런 문제들이 2010년에는 백년대계, 균형, 소통의 삼박자를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올해 경인년에는 호시(虎視)하며 우행(牛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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