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기수 충북대 경영대학 교수

하루하루를 살아가다보면 반복되는 일과 식상하리만큼 고루한 삶의 무게에 지쳐가기 마련이다.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고 돈을 많이 벌어 호위 호식하고자, 사람들은 주어진 삶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지혜의 힘을 추구하게 된다. 우리는 지혜의 원천과 기술을 얼마나 갖고 있을까?

"발타자르 그라시안"이라는 17세기 작가이자 철학가의 인생지침서를 보면 아주 옛날의 지침이 이 시대에 부합이 될까하는 의구심은 완전히 사그라진다. 대신 통쾌하고 직선적인 그것이 사람들에게 아니 내 가슴을 파고들어왔다. 우왕좌왕하게 되는 사람들과의 관계, 상처받지 않고자 하는 노하우가 왜이리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짜릿했다. 갈증나고 안개처럼 자욱했던 고민과 애달픔을 날려버리기에……. 우리는 관계에 대해 애매모호하다. 그리고 도덕책과 공자님의 말씀을 통해 기본적인 개념도 배웠다. 하지만 현실에서 부딪치며 살아가노라면 슬픔과 좌절과 분노가 항상 톱니바퀴인 냥 돌아가며 존재하고 있다.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기에 좋지 못한 것은 아주 떨구어 버릴려고 그런가보다. 지혜의 기술을 내 것으로 소화시키다보면 내게 맞는 건 양분이 되어 피와 살이 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다가올 미래를 위해 한 켠에 저축해 요긴하게 쓸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위해 오늘도 침묵하지만 가슴과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갈구하고 있다. 사람들과 나와 이 세상이 다 같이 올바른 정도(正道)의 길을 걷고자 지혜의 기술을 이용한다면 충만한 자신감과 분별력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켜 볼만한 일이다.

아름다운 선율 속에 선한 시선으로 돋보이고 싶지 않은가! 적어도 지혜로운 자신감이 날 길들이게 하고 싶다. 지혜의 창 속에서 공존하며 놀 수 있는 손에 잡힐 듯 말 듯한 그것이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날 열정으로 내몰게 할 것이다. 그래야만 이 세상에 녹아듦으로써 지혜의 가치를 탐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요즈음 같은 때에 삶의 무게를 다소 가볍게 짊어지고 싶어하는 젊은이와 우리 아버지 어머니 세대에는 어떤 지혜의 교류가 존재해야만 할까? 아주 현실적인 것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 지혜의 샘을 마치 도용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좀 더 윤택한 삶의 길이 보여질 것 같다.

따라서 절박한 상태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원칙으로 자리매김해야할지 Negative적인 발상같지만 옹졸한 기술을 어떻게 추려낼건지 순수한 결정체의 지혜를 어떻게 다듬고 포장해서 보존할건지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기름지고 햇볕이 잘 드는 땅에서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얻듯 우리는 좀 더 멀리 보는 시각으로 지혜의 기술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과연 지혜란 어디서 시작해서 그 끝은 어디일까? 거창하고 유일무이한 현인(賢人)에서만 나오는 샘물이 아니라 비천하지만 평범하기 짝이 없는 보잘 것 없는 존재에서도 지혜를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밥만 먹고 살 수 없듯, 사람이란 본디 다듬고 익혀서 널리 이롭게 해야하니 참 세상살이는 지혜의 경쟁속에 승리하는 자만의 몫이던가! 세상의 가치속에 우리는 혹은 나는 마음의 소리를 경청하며 나의 무지(無知)를 한탄만 할 게 아니라 긍정적인 마인드로 지혜의 기술을 한겹한겹 쌓아가고 싶다.

지나가는 TV광고 속 카피에서 "같이의 가치"란 말이 나왔다. 참 소중하고 아름다우며 지혜로운 문구라 인상깊었다. 나 홀로가 아닌 세상 사람들과 같이 나누고 싶어하는 의지가 고스란히 깔려있다. 성숙한 지혜의 기술을 세상과 같이 공유해서 찬란하고 무궁한 이상(理想)에 기대를 건다. 결국 지혜란 사람들 속에서 사람과의 관계에 빛을 내며 무한한 샘물의 경지를 내는 것이 진정한 지혜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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