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화학과 교수

지난해부터 국내 여러 유명 출판사에서 의욕적으로 세계문학전집을 새로운 번역과 감각적인 디자인 그리고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요즈음 세계문학전집의 특징은 종전 몇십권 짜리 세트로 출간되던 것에 비하여 낱권 구매 형태가 강화되고 수록작품도 제3세계권을 포함하여 범위가 다양해졌을 뿐만 아니라 한글세대 번역자들을 중심으로 국내에서 처음 번역되는 작품 비중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그러나 문학작품 제목과 대강의 줄거리 그리고 주인공 이름정도는 기억하지만 사실상 거의 읽히지 않는 '세계명작'이 여전히 많다. 그러나 우리 귀에 익숙한 세계 '명작' 은 이미 오래전부터 작품 완역보다는 초역이나 줄거리 다이제스트 형식의 '세계소년소녀명작전집' 같은 이름으로 만들어 보급해오고 있다.

이렇듯 높은 명성에 비하여 실제로는 별로 읽혀지지 않는 '명작' 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중 하나는 '걸리버 여행기', '돈키호테' 같이 상징성이 매우 높은 작품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사실 뛰어난 정치소설, 걸출한 풍자소설로서 어린이들이 접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외설적인 대목도 여럿 있어 '동화'라는 범주로는 묶을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린이 권장도서목록에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다.

또 하나의 경우는 말하자면 대중성, 통속성이 두드러지면서 여러차례 영화, 드라마, 연극 등으로 만들어져, 원래 텍스트를 전혀 읽지 않았지만 어쩐지 읽은듯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사례이다.

우리 고전 '춘향전'이 그러하고 일본식 이름 '춘희(椿姬)'로 더 널리 알려진 '동백꽃을 단 여인'같은 작품이 여기에 해당된다. 남녀노소 누구나 소상하게 줄거리와 주인공의 캐릭터 그리고 해피엔딩 결말을 알고있는 '춘향전'이지만 막상 작품을 활자화된 문학 텍스트로 읽어 볼 기회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의 대표작 '레 미제라블'은 명작이 읽히지 않는 이런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되는 듯 하다. 그런 까닭에 국내에서 출판된 5∼6권 짜리 우리말 완역판 몇 종류가 독자를 확보하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 문학 나아가 서양문학 작품 인지도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다면, 알고 있는 작품이름 가운데 상위를 차지할지 모르지만 마지막권 끝까지 다 읽어본 작품순서를 따진다면 순서는 달라질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2권 짜리 발췌 번역판이 무수히 나왔고 어린이용 다이제스트, 번안만화, 논술용 교재 심지어 영어학습만화로도 출판된 '레미제라블'의 본격 우리말 번역은 1973년 처음 나왔다가 모습을 감춘 뒤 2002년 빅토르 위고 탄생 200주년에 즈음하여 6권짜리가 다시 간행되었다. 그 사이 5권으로 구성된 또 다른 번역판이 시판되었지만 판매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바빠지는 현대생활에서 몇권짜리 세계명작을 쌓아놓고 읽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문장호흡이나 원작의 리듬이 요즘 사람들의 감각에 적절히 부응하기 어려운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두 권 짜리 초역판 그것도 대부분 일본번역 중역의 조잡하고 무책임한 문장의 초역(抄譯)판은 마구잡이 분량삭제와 고증을 도외시한 상황묘사, 등장인물 성격 역시 지나친 획일화와 변형으로 작품 메시지 이해에 걸림돌이 되기 쉽다.

발표 이후 지금까지 인류에 회자되는 여러 문학작품들은 단순한 '명작'개념을 넘어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 반열에 올랐다. 읽지 않고서도 아는 듯한 명작, 때로 아는체 했던 명작, 방대한 분량앞에서 읽을 기회를 놓친 명작, 어린시절 왜곡된 미디어로 어설프게 접했던 명작. 그러나 삶을 충만하게 채우고 진정한 '나'를 찾고 싶은 모든 이에게 동서양의 명작들은 여전히 크게 팔을 벌린 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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