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선 교육평론가

대답부터 하자. "한병선의 교육평론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독자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필자는 항상 3가지 준거에 의해 교육을 평한다. '탈 이념', '수요자 중심', '인권존중'이다. 지금까지 400꼭지 가까운 글을 썼지만 이 원칙을 벗어난 적은 없다.

담차(談次)에 "왜 학생들의 인권인가?"라는 질문도 받는다. 이런 경우는 필자의 인권 강조를 마뜩치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생의 인권을 다시 거론하는 이유다.

#인권은 '영원한 시대정신'

인류역사는 한 마디로 인권을 위한 투쟁사다. 멀게는 프랑스 혁명(1789)에서부터 가깝게는 인간답게 살고자 저항했던 우리역사의 근현대사적 사건들이 모두 그런 경우다. 잘 알 듯 프랑스혁명 직후 채택된 인권선언은 새로운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이후 각국에서 이런 흐름을 타는 변화들이 지속되어왔다.

인권은 인격권이다. 보편적 권리로 인간다움을 유지하게 하는 최소한의 권리다. 청소년 또는 학생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인권은 성별과 나이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시대를 통관할 수 있는 '영원한 시대정신(zeitgeist)'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인권존중' 준거도 이런 맥락이다.

학교에서의 인권문제는 체벌과 외모단속으로 귀착된다. 특히 외모단속은 학생과 교사 간에 끝없는 전쟁의 연속이다. 한판 승부로 결판나지 않는다. 지도방식도 군대식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불거지는 것이 교사들의 인권침해다. 실제로 교사들의 인권의식은 묻기가 겁날 정도다. "그놈의 인권 때문에…" 라는 말을 달고 사는 교사들이 많다. 전형적인 '인권포비아(human rights-phobia)' 증세다.

인권의식에 대한 무지는 폭력에 대한 민감성 약화로 이어진다. 매년 벌어지는 신입생 길들이기 같은 폭력문화, 군대 내에서 일어나는 구타 등도 따지고 보면 폭력에 대한 둔감성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이런 모습은 70~80년대 교련(敎鍊)을 시켰던 시절의 문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안타깝게도 인권의 사각지대는 학교다.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인권은 없다"는 말 그대로다. 풀어주어야 할 것과 지도해야 할 것들을 한 묶음으로 만들어 놓은 탓이다.

이런 문제는 결과적으로는 생활지도에서 선택과 집중을 어렵게 만든다. 사회적 냉소주의를 키울 가능성도 있다. 풀어줄 것은 풀어주고 지켜야 할 것은 지키도록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활지도도 선택과 집중 필요

인권에 기반하지 않은 교육은 좋은 교육이 아니다. 인권적으로 우(愚)를 범하는 교육을 바른 교육으로 말할 수도 없다. 인권 무담보 교육을 미래지향적 교육으로 평가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과거 봉건적 신분의 경계를 허물고 자유를 상징했던 단발령이 오늘날 학교에서는 인권과 개성을 제한하는 강제가 되고 있음은 아이러니가 아닌가.

교사들은 학생들에 대한 인권민감성을 높여야 한다. 인권에 기반한 새로운 생활지도 패러다임을 다시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집단을 우선적으로 여기는 통제관에서 벗어나 인권을 존중하는 성장 중심의 '개방적 통제관'으로 나아가야 한다.

학교는 말 그대로 명실상부한 교육공간이 되어야 한다. 누가 뭐래도 학생들의 인권이 존중되는 공간을 지향해가야 한다. 교육공간이 인권을 제한하는 후진적 공간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학교에서 인권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쳐야 훗날 인권을 존중할 줄 아는 구성원이 되지 않겠는가?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